서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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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미술사(양장본)
    서양미술사(양장본)
    전세계 독자들이 인정하는 서양미술사 개론의 필독서
    저자
    E.H. 곰브리치
    역자
    백승길, 이종숭
    정가 53,000원
    판매가 50,350원 (5% 할인, 적립금 2,650p)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징검다리 서양미술의 윤곽을 잡아주는 입문서이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최고의 인문학 서적 선사시대부터 현대 미술까지, 방대한 서양미술사를 700페이지, 컬러 도판 413개로 완​성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미술서, 19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800만부 이상 판매된 책, 선물하기 좋은 책, 선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읽는 책, 당신의 삶을 바꿀 책,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최고의 인문학 서적……. 책의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고 다양한 찬사를 쏟아냈다. 그 모든 말들이 이 책을 관통하는 결정적인 말이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만 고르라면 ‘서양미술사 개론의 필독서’라는 말을 고를 것이다. 진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진리를 표현하는 말은 보편적이고 평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서양미술을 알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책이다.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이론적 훈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최적이기 때문이다. 선사시대 동굴벽화부터 실험적인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고, 미술사를 통틀어 위대하고 뛰어난 작품들을 각 페이지마다 시대와 양식, 작품명, 작가명과 함께 알기 쉽게 정리하여, 서양미술의 질서 체계를 파악하도록 돕는다. 그 방대한 역사를 한권에 담아 오랫동안 읽히는 것, 오로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만이 가능한 일이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서양미술사》 서문의 첫 문장이다. 책을 펴면 도판이 눈에 먼저 들어오지만, 글을 읽다 보면 사람이 느껴진다. 미술가가 왜 그렸는지, 그리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 그림 속 대상과 미술가의 관계 등을 읽고 생각하다 보면 다시 그림이 보인다. 평이한 말로 풀어간 사람 이야기가 결국 미술 이야기, 미술의 역사가 곧 사람의 역사가 되었다. 이 흐름을 따라 가다 보면 책을, 미술을, 예술을, 삶을 놓을 수가 없다. 앞으로의 역사에서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늘 곁에 있을 것임을 믿는 이유이다.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에 대한 것이다.” - by 곰브리치

  • 서양미술사(문고판)
    서양미술사(문고판)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작고, 가볍게 만나다!
    저자
    E.H.곰브리치
    역자
    백승길, 이종숭
    정가 25,000원
    판매가 23,750원 (5% 할인, 적립금 1,250p)

    지금까지 출판된 미술에 관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책, 에른스트 H. 곰브리치의 명저《서양미술사》가 문고판(Pocket Edition)으로 출간되었다. 1950년 영국에서 초판이 간행된 이래 전 세계에서 서양미술사 개론의 필독서로 입지를 굳힌 이 책은 초판 간행 이후 제16차 개정증보판으로 거듭 출간되었고, 국내에서만 35년이 넘는 긴 출판역사를 거쳐 왔다.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는 데 힘입어, 원출판사인 파이돈 출판사에서는 더 많은 독자들이 일상에서 쉽게 서양미술사를 접할 수 있도록 문고판을 기획했다. 서가용으로만 한정되던 기존 판형의 단점을 개선해, 태블릿 PC처럼 이동 중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손에 잡히는 크기로 구성했으며, 얇고 가벼운 종이를 사용해 책을 지니고 다닐 때의 부담감을 덜었다.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로부터 오늘날의 실험적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제를 다룬 이 책은 곰브리치만의 유려한 필치로 기술되어 마치 소설처럼 읽어가며 미술사의 진면목에 빠져들게 된다는 매력이 있다. 1900년대 초, 빈에서 태어난 작가의 글을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열광하며 읽는다는 것은 경이로운 한편, 이 책을 넘어서는 또 다른 미술사 책이 출간되지 못했다는 것은 곰브리치의 저력을 새삼 실감케 하는 근거가 된다.출간 이후 단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는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의 시작 미술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가 미술이라고 부르는 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내재된 의미가 변천되어 왔다고 곰브리치는 말한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색깔 있는 흙으로 들소의 형태를 그리는 그런 사람들이 미술가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물감을 사서 게시판에 붙일 포스터를 그리는 사람들도 미술가들이다. 우리들이 미술이라 부르는 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고유 명사의 미술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한, 이러한 모든 행위를 미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미술이라 부르는 활동이나 작품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랐다. 미술 대학을 나와 화실을 열고 창작에 몰두하다가 몇 차례 개인 전시회도 열고 상도 받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화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걷는 미술가로서의 길이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의 미술가들은 사냥감이 좀더 많아지고 사냥에서 성공을 거두어 굶주리지 않게 되기를 기원하면서, 동굴 벽에 사냥감에 모습을 그려 넣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결국 우리가 미술과 미술가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관념은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지나간 시대의 미술 및 미술가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술 및 미술가를 역사적으로, 곧 시대의 변천에 따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곰브리치가 선사 시대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기나긴 미술의 역사를 이야기하려 한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 어떻게 볼 것인가사실 관객에게 중요한 건 미술의 개념이나 범주보다는, 지금 내 눈앞에 놓여 있는 바로 저 그림 혹은 저 조각상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이다. 시대별로 두드러진 수많은 양식이 적용된 각각의 작품들에 대한 관람객들의 호불호는 늘 일정하지 않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에 따라 작품의 좋고 그름을 선정하다. 등산을 싫어하기 때문에 산 그림을 보고 본능적으로 등을 돌리거나, 어떤 초상화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연상케 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등 개인이 삶에서 축적한 경험에 따라 작품에 대한 선호도는 달라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현실 생활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림 속에서도 보기를 원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것, 대체로 아름답다고 규정짓는 것들에서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냐에 관한 취향과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 그것이다. 예컨대 고생에 찌들린 늙은 어머니를 진실되게 그린 뒤러의 습작은 보는 이에 따라 시선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작품의 가치를 측정할 수는 없다. 미술에 대한 취향은 분명히 음식과 술에 대한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것은 여러 가지 미묘한 맛을 발견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훨씬 진지하고 중요한 일이다. 위대한 거장들은 미술 작품에 그들의 모든 것을 바쳤고, 작품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심혈을 기울였으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최소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미술 작품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안다는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왜 미술가들이 그처럼 독특한 방법으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특정한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들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미술품이든 그 작품 속에는 무수히 많은 역사적, 문화적, 심지어 과학 기술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작품을 남긴 작가의 삶이라는 배경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결국 하나의 미술 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일은 그러한 배경들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같은 대상을 앞에 놓고서도 그 대상의 배경에 대해 좀더 많이, 정확하게 아는 사람만이 그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곰브리치의 저작이 무엇보다 가치가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미술 작품을 보는 우리의 눈을 날카롭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키워줄 것이다. 곰브리치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밝힌 것처럼 그는 설익은 지식과 속물근성으로 미술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미술에 대한 눈을 뜨기를 원하는 것이지, 입을 헤프게 놀리는 일을 돕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며 이 책의 집필 배경에 대해 분명하게 밝힌 바가 있다.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곰브리치만의 필력“책은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을 한 로마의 시인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그의 말을 손으로 베끼고 또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말이 곳곳에서 쓰여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곰브리치 역시 이 책을 집필하면서 이 책의 미래에 대해 꿈꾸어본 적이 없었다. 곰브리치는 아직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한 사람들, 특히 자신들의 힘으로 이제 막 미술 세계를 발견한 10대의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집필했다고 서문에 밝힌 바가 있다. 미술이라는 넓은 분야의 지세(地勢)를 보여주고, 까다롭고 복잡한 인명과 각 시대와 양식들을 알기 쉽게 정리함으로써, 보다 더 전문적인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곰브리치는 미술책은 으레 어려울 것이라는 고정된 인식을 줘 이쪽 분야를 등한시하게 만드는 현학적인 용어나 얄팍한 감상의 나열을 최대한 피하는 것을 우선으로 본서의 방향을 잡았다. 지나치게 평범하고 비전문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평이한 말을 사용하려고 성심껏 노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도판으로 보여줄 수 없는 작품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피했으며, 인명 나열로 얼룩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리고 작가와 작품의 선택 범위는 진정으로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것으로 한정지었고, 유명한 걸작들이 저자의 개인적인 기호 때문에 제외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자제를 했다. 왜냐하면 분명히 진부한 작품들의 낯익은 모습이 오히려 고마운 이정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평범한 말로 미술의 역사를 다시 한번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미술 감상을 돕고자 하는 데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렇기에 그 자체로서 생명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출간 이후 60년이 지나서 문고판으로 재탄생한 최고의 미술 입문서이 문고판 《서양미술사》는 2001년 저자가 작고한 이후 최초로 새롭게 간행된 판이다. 35개 언어로 번역되어 미술 입문서로서 역사상 가장 유명하며 가장 잘 팔린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초월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최고의 미술 입문서로 남아 있는 이 책은 전 세계의 수많은 학생, 미술 애호가와 전문가들에게 최초의 기착지가 되어주고 있다. 이 책은 한눈에 휴대성과 편리함이 느껴지도록 하기 위한 파이돈 출판사 발행인의 고민이 깃든 결과물로, 최대한 휴대성을 확보하기 위해 텍스트 부분에는 경량지를 사용했으며, 이미지는 뒷부분에 분리해서 실었다. 책끈을 여분으로 하나 더 넣어 텍스트를 읽으면서 이미지를 함께 펼쳐보는 데 무리가 없도록 구성된 이 책은 기존 16판과 텍스트와 이미지 모두 동일하게 실려 있다. 단, 매 장 끝에 저자가 수록했던 (하지만 본문과 직접 연관되진 않는) 작은 삽화는 문고판의 레이아웃에서 별 의미가 없다는 판단으로 빠지게 되었다. 디자인과 레이아웃의 각 요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곰브리치가 이 문고판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나, 더 많은 이들이 서양미술사를 쉽게 접할 수 있기를 바라던 곰브리치의 뜻은 현재의 전 세계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것으로 생각된다.곰브리치는 현학적인 표현을 삼가고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참신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는 단지 몇 마디만으로 한 시대의 전체 분위기를 조명할 수도 있다. _《더 타임스》읽고 또다시 읽을 책이다. _ J. 카터 브라운, 전 워싱턴 국립 미술관장이자 미국 미술원장  이 책은 당신의 삶을 바꿀 것이다._ 제레미 아이작스, 런던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하우스 전 총괄 디렉터 아직까지도 이 책이 기드온 성경과 함께 호텔 침대 옆 탁자에 놓이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놀라울 뿐이다.곰브리치의 글은 신의 목소리만큼 힘차고 권위가 있으니……._《버밍엄 포스트》영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미술서,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으며 꾸준히 수요가 있는, ‘선물하기 좋은 책’ 중에서도 드물게 실제로 사람들이 읽는 책. 미술이라는 주제는 곰브리치의 손에서 바야흐로 천의무봉을 이루었다. _《더 타임스》, <1945년 이후의 가장 중요한 책 100권> 

  • 고갱 (Art Classic 13)
    고갱 (Art Classic 13)
    근대 회화에 수많은 길을 열어 준 고갱을 살펴본 책
    저자
    엘레나 라구사
    역자
    윤인복
    정가 19,800원
    판매가 18,810원 (5% 할인, 적립금 990p)

    그들은 나의 예술을 조잡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옳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나 자신도 어떤 방향으로 변해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비평이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결국엔 내 작품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반 고흐, 세잔과 함께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 화가로 인정받고 있는 고갱, 그러나 세 사람 모두 당대에는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활동한 시대는 르누아르, 마네, 드가, 모네 등이 일으킨 인상주의가 성행하였고 쇠라와 시냐크를 축으로 점묘 기법과 신인상주의가 새롭게 각광을 받을 때였다. 자연을 양식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인상주의는 주로 빛에 의해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 현상을 묘사하는 풍경화의 형태로 나타났다. 즉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는 과학적 발전이 반영되어 기법이 달라졌을 뿐 본질적으로 사실주의의 연장이었다. 이처럼 사실 묘사가 여전히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대상이 주는 ‘내면의 울림’에 대한 표현을 우선한 반 고흐나 고갱의 그림은 매우 낯설고 서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당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당신은 내가 예술의 중심지 파리를 떠난 것이 잘못이라고 말했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오래 전부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 나의 예술의 중심지는 내 두뇌일 뿐, 결코 파리가 아니야. 나는 강한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않고, 내 안의 것을 반드시 완성시킬 것이기 때문이야.언론인 아버지와 페루 식민 귀족 가문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고갱은 정치 문제로 일찌감치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지내며 일찌감치 이국풍의 생활을 맛본다. 프랑스로 돌아와 교육 및 군 복무를 마치고 주식 거래인이자 평범한 가장이 된 그는, 뒤늦게 취미로 그림을 시작했다가 피사로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린다. 하지만 고갱은 자연을 이상화하거나 감성적으로 재현한 예술을 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눈의 감각을 세밀하게 구성하는 인상주의로부터도 멀어지고, 결국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가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을 떠난다. 브르타뉴에서 고갱은 에밀 베르나르 등 젊은 화가들과 굵은 윤곽선, 장식적인 색면으로 구성되는 회화 유파인 ‘퐁타방파’ 혹은 종합주의를 창립하고, 아를에서 일 년 남짓 반 고흐와 함께 작업하기도 한다. 좀더 순수하고 ‘야만적’인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 남태평양의 타히티까지 간 그는 회화적 절정기를 맞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등 대표작들을 만들어낸다. 몇 년 간의 생산적인 작업 후 고갱은 자신이 회화의 미래임을 확신하며 파리로 돌아오지만,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차가운 대중과 평론계의 반응에 부딪친다. 드가와 말라르메 등 소수는 그의 그림을 극찬했지만, 그것으로는 생활고가 해결되지 않았다. 얼마 견디지 못하고 다시 열대로 돌아간 그는 마르키즈 제도에서 궁핍과 병마와 싸우며 그림을 그리다가 고독하게 생애를 마친다. 예술가는 야만성을 완전히 상실했고, 본능적 직관에서 비롯되는 상상력마저도 잃어버렸지. 결국 혼돈에 빠진 군중에게로 전력해야 했고, 혼자 있을 때는 길 잃은 사람처럼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지.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외로움을 권할 수는 없는 것이네. 외로움을 견디고 혼자서 행동하려면 그럴 만한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배운 것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족쇄였을 뿐이야. 이제 나는 이렇게 외칠 수 있지.“아무도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 나는 눈곱만큼밖에 모른다!” 그러나 그 눈곱만큼의 지식은 순전히 내 것이야. 고갱은 근대 회화에 수많은 길을 열어주었다. 단순하고 굵은 윤곽선과 넓고 평평한 색면의 강렬한 조화는 1890년 이후 널리 보급된 아르누보를 예견하였고, 비사실적인 색채로 그림을 구성한 점은 마티스를 비롯한 야수파로 이어졌다. 게다가 유연한 형태와 목판화 같은 거친 질감은 표현주의로, 이성으로부터 벗어나 내면세계와 무의식적 직관에 기대려는 경향은 초현실주의로 흘러 들어간다. 또한 가족을 비롯한 모든 것을 버리고 먼 이국에서 비로소 자신의 화풍을 찾았으나 사람들에게 외면당하여 고국을 등진 채 그림을 그리다 죽은 그의 삶은, 영국 소설가 서머셋 몸의 명작 《달과 6펜스》를 탄생시키는 등 ‘천재 예술가’에 대한 현대적 관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갱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물론 먼 이국 땅에서 고독하게 탐구했던 그의 예술론을 편지와 저술로 담아낸 이 책은, 독자에게 그의 천재성을 생생하게 보여줄 것이다.꿈꾸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내 영혼 안에서, 내 주위에서 처연히 흐느끼고 있는 것을 이해 가능한 알레고리로 표현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의 꿈-그림은 끝났습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 우리는 누구인가’, ‘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
    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
    에드바르 뭉크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그의 '시각적 자서전' 
    저자
    이리스 뮐러 베스테르만
    역자
    홍주연
    정가 33,000원
    판매가 31,350원 (5% 할인, 적립금 1,650p)

    에드바르 뭉크처럼 자신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솔직하게 드러낸 화가도 드물다. 유전된 광기, 불행한 가족사, 사랑의 좌절 끝에 스스로를 세상에서 단절시킨 후에야 평안을 찾은 그에게 그림은 매순간의 정신 상태를 포착하고 이해하기 위한 스냅샷이자, 심연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절벽 위 한줄기 길이었다. 뭉크는 화가가 된 1880년대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회화 70여 점과 판화 20여 점, 수채화와 드로잉 100여 점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기록했다. 이러한 자기 분석을 통해 그는 렘브란트, 고야, 반 고흐 같은 위대한 자화상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게 되었다. 자화상에서 뭉크는 죽음, 사랑, 섹슈얼리티, 삶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뿐만 아니라 국외자局外者(그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유명해진 한참 후에야 고국 노르웨이에서 인정받았다)로서 자신의 위치를 고찰했으며, 이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현대인이 느끼는 소외와 고독에도 공명한다. 우리는 그의 자화상을 통해 한 남자의 청년기부터 노년기까지를 엿볼 수 있으며, 자연주의에서 상징주의와 표현주의로 나아가는 예술 사조의 변화도 목격할 수 있다. 뭉크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이 책은 뭉크의 화집이자 그가 평생 남긴 행적 및 기록들을 예리하게 분석한 평전이다. 또한, <절규>의 황혼녘에서 마지막 자화상 <새벽 2시 15분>의 여명에 이르는 그림들을 통해 뭉크의 내면을 꼼꼼히 읽어낸 미술비평서이기도 하다. 저자는 예술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뭉크의 삶에 존재한 모든 굴곡을 추적하면서, 이 그림들이 그의 내밀한 경험들을 얼마나 강렬하게 포착해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좀처럼 접하지 못한 중년 이후의 작품들을 다수 포함시켰으며, 또한 화가가 자신을 보는 시각을 깊이 있게 탐구하기 위해 자화상이 아니라 해도 주요 작품들은 빼놓지 않았다."나의 예술은 가라앉는 배에서 무전 전신기사가 보내는 경고 전신과도 같다. 하지만 나는 이 불안이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느낀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병이 없었다면 나는 키를 잃은 배와도 같았을 것이다."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5살 때 결핵으로 사망했고, 남매 중 가장 가까웠던 누나 소피에 또한 그가 14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목사의 아들이었던(뭉크Munch는 수도사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매우 엄하게 키웠고, 죽은 어머니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이야기로 겁을 주기도 했다. 남매들 중 결혼을 한 사람은 남동생 안드레아스뿐이었으나 몇 달 후에 죽었으며, 여동생 하나는 젊은 나이에 정신병 진단을 받았다. 1889년에는 아버지마저 작고하는데, 아버지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죄책감 때문인지 더욱 절망에 빠진 뭉크는 자살을 고려하기도 했다.  <절망>은 뭉크가 해질녘에 산책을 하던 중 경험한 불안감을 최초로 표현한 작품이다. 모자를 쓴 남자가 난간에 기대어 있고 다른 두 사람은 다리 위를 걸어간다. 뒤에는 언덕으로 둘러싸인 피오르가 보인다. 해가 지면서 강렬한 붉은색이 풍경을 물들이고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심한 피로감에 멈춰 서서 난간에 몸을 기댔다.불타는 듯한 구름이 짙푸른 피오르와 도시 위로 피 묻은 검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지만 나는 불안으로 몸을 떨며 서 있었다. 자연을 꿰뚫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뭉크의 가장 유명한 그림 <절규>는 이 주제를 더욱 발전시켰다. 인물은 이제 관람자들을 향해 돌아서 있으며 벌어진 입과 텅 빈 눈을 가진 무성의 존재이다. 그는 자신이 지르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다.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듯한 그림 속 공간은 불안한 심리상태를 반영하며, 과감하게 단순화된 인물과 배경 묘사는 관람자를 화가의 주관적 감정 상태에 집중시킨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뭉크의 또 다른 유명한 그림 <마돈나>는 보통 임신한 여성으로 해석된다. 같은 주제로 제작한 판화의 테두리에는 태아와 정자가 그려져 있는데, 여성의 본질은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에 있다는 의미이다. 이 그림은 <담배를 든 자화상>과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다. 자화상에는 머리와 담배를 든 손 사이에, <마돈나>에는 머리와 벌거벗은 몸 사이에 긴장감이 존재한다. 여성이 머리를 몸에 바침으로써 창조성을 지닌다면, (뭉크를 비롯한) 남성의 창조성은 머리와 손의 상호 작용에서 나온다. 한편, 수채화 <고통의 꽃>은 뭉크와 닮은 얼굴의 남자가 맨몸으로 시커먼 흙 속에서 나오는 모습을 묘사했다. 그의 심장 근처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와 흙으로 스며든다. 화가는 왼손으로 상처를 누르고 오른손은 위로 올려 고통으로 젖혀진 머리를 붙들고 있다. 눈 부분이 눈가리개처럼 까맣게 칠해진 화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가장 깊은 내면의 감정인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의 오른쪽 팔꿈치는 피가 땅에 스며드는 지점에서 솟아오른 ‘고통의 꽃’을 가리키고, 왼쪽 팔꿈치는 아래쪽 흙을 향해 있다. 예술의 원천은 화가의 심장에서 솟는 피다. 하지만 꽃은 피에서 바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고통이 예술로 바뀌는 것은 오로지 ‘흙과의 연결’, 즉 실제 삶과 연결된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고통의 꽃은 뭉크가 예술가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의 바탕이었다. 이 그림 속 남자는 <마돈나>의 여성과 자세가 비슷하다. 여성이 고통 속에 아이를 낳듯이 예술가도 고통 속에서 예술을 창조한다. 이처럼 여성의 생명 창조와 남성의 예술 창조를 대등하게 본 뭉크의 시각은, 그가 자신의 그림을 ‘고통 속에 태어난 자식들’로 표현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의 길은 나를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가 있는 절벽 가장자리로 이끌었다. 가끔은 그 길로부터 도망쳐 사람들 사이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매번 다시 절벽 위로 돌아와야 했다. 그것이 심연으로 뛰어들기 전까지 걸어야 할 나의 길이다."1898년에 뭉크는 툴라 라르센을 만났다. 그는 이 아름답고 자신감 넘치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고, 창작에 있어서도 왕성한 시기를 맞아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연작 '생의 프리즈'를 완성한다. 뭉크가 툴라를 여성성의 전형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그가 쓴 편지에 잘 드러난다. 나는 마치 수정처럼 변화하는 수천 가지 표정을 가진 여러 여자들을 봐왔어. 하지만 오직 세 가지 강렬한 표정만을 분명하게 지닌 여자는 만나본 적이 없어. (...) 당신은 가장 깊은 슬픔의 표정을 갖고 있어. (...) 마치 옛날 라파엘로 이전 시대의 성화 속 눈물 흘리는 성모마리아처럼 말이지. 그리고 당신이 행복할 때-나는 그토록 빛나는 기쁨의 표정을 본 적이 없어. 마치 당신 얼굴에 갑자기 햇빛이 쏟아지는 것 같아. 그리고 당신이 가진 세 번째 얼굴, 이것은 나를 두렵게 만들어. 그것은 운명의 얼굴, 스핑크스의 얼굴이야. 그 안에서 나는 여성의 위험한 특성을 발견하지.이 편지는 뭉크가 ‘생의 프리즈’를 대표하는 <생의 춤>을 그리던 시절 쓴 것이다. 이 때문에 <생의 춤>에서 붉은 옷의 여성은 흔히 툴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여성은 뭉크의 첫사랑 밀리 타울로브일 것이다. 뭉크는 자신의 과거와 춤추고 있는 것이다. 툴라는 다른 두 여성, 왼쪽에서 꽃을 꺾으려 하는 흰 옷의 여성과 오른쪽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여성으로 나타난다. 뭉크는 <생의 춤>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내 (진짜) 첫사랑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 그녀는 사랑의 꽃을 꺾으려 하지만 꽃은 꺾이지 않는다. 반대편에는 검은 옷을 입은 그녀가 슬픈 얼굴로 춤추는 커플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그녀와의 춤을 거절당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거절당한 채.툴라는 결혼을 원했지만, 비극적 가족사와 자신의 정신병 유전이 두려웠던 뭉크는 자신에겐 예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이를 회피하곤 했다. 툴라와의 격렬한 관계는 1902년에 비극적인 파국을 맞는다. 툴라와 다투던 뭉크가 자신의 왼손에 권총을 쏜 것이다. 툴라는 얼마 후 뭉크의 친구였던 다른 화가와 결혼했고, 뭉크는 그 후로도 십 년이 넘게 그림들을 통해 그녀와의 관계를 되새겼다. “나를 비난하지 마. 내가 삶을 살고 있지도,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슬퍼해줘. 나는 그저 고통스러운 열망을 품고 창가에 앉아 나를 둘러싼 끔찍하도록 시끄럽고 낯선 삶의 소란을 지켜볼 뿐이야.”1908년에 뭉크는 신경쇠약을 일으켰고 다음 해 봄까지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술을 끊고 국가에서 훈장을 수여받아 예술가로서 인정받고 정신적으로도 안정된 그는 은둔하여 작업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에켈리에 농장을 구입한 뭉크는 여생을 그곳에서 홀로 살아갔다. 이제 그의 그림은 강렬한 불안감보다는 차분한 우울함을 느끼게 하며, 붉은색보다 푸른색이나 초록색이 눈에 띈다. <자화상, 밤의 방랑자>에서 뭉크는 실내복 차림으로 한밤중에 에켈리의 휑한 방을 맴돈다. 그가 서 있는 베란다 문으로부터 내다본 풍경은 <별이 빛나는 밤>에 나타나 있다. 뭉크는 차가운 밤공기와 자신의 머리가 드리운 그림자에 자신의 고독을 투사한다. 지평선 멀리 도시의 불빛과 빛나는 별들은 광대한 공간으로 구도를 확대하면서 고독감을 더욱 증대시킨다.  그러나 작은 행복의 순간들도 있었다. <개들과 함께 있는 자화상>에서 뭉크는 애완견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뭉크의 몸 앞쪽은 환한 햇빛을 받고 있어 그가 개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화가가 뻗은 손과 개들의 주둥이 사이 공간이 그림의 중심을 형성한다. 이 공간은 비어 있지만, 곧 화가의 손과 개들이 만나면서 채워질 것이다. 기대가 현실과 만나기 직전의 짧은 순간은 모든 가능성으로 충만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마법의 순간이다.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화가가 스스로 짊어진 고독 속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뭉크가 자신을 마지막으로 여성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 보헤미안의 결혼식>에 대해서, 그의 모델 비르지트 프레스퇴는 이렇게 기록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뭉크가 자기를 만나러 와줄 수 있냐고 했다. 그는 혼자 있었고, 전구도 장식도 달려 있지 않은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만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는 내게 테이블에 놓인 과일을 권했다. 내가 손을 뻗어 사과를 집자 그가 말했다. '그렇게 앉아 있어, 그대로.' 그것이 <보헤미안의 결혼식>의 시작이었다. 내가 가야 할 시간이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계속 있으려면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겠지만, 아마 그러지 않는 게 좋겠지. 집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크리스마스이브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야 하니까.'그의 마지막 자화상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강박적이고 예리한 정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구 머리가 있는 자화상>에서 뭉크의 눈은 접시 위 물고기의 눈처럼 퀭하다. 뭉크는 평생 채식주의자였지만 노년에는 단백질 섭취를 위해 생선을 먹었다. 노르웨이에서 대구 머리는 진미로 통한다. 그러나 이 자화상에는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기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뭉크는 나이프와 포크를 요리에 찔러 넣으려 하는 순간 물고기와 자신의 본질적 연결고리를 느낀다. 죽은 물고기의 머리는 뭉크를 자신의 죽음과 대면시킨다. 한편 정면에서 바라본 얼굴을 묘사한 자화상 습작은 말년의 <절규>라 할 만하다. 다만 <절규>가 삶의 불안을 그렸다면 이 습작은 죽음에의 불안을 그렸다는 것이 다르다. 공포에 사로잡혀 크게 뜬 그의 눈을 마주하며, 관람자도 자신 속의 두려움과 맞닥뜨리게 된다.<자화상, 새벽 2시 15분>에서 화가는 거의 투명해 보이는 몸을 안락의자에서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스스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단호하고 곧은 표정은 자신에게 더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자각을 보여준다. 주변의 공간은 녹아 사라져가며,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그를 기다린다. 늙은 화가는 매혹과 공포에 사로잡혀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나는 갑작스럽게 혹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이 마지막을 경험하고 싶어.여든한 살의 수명을 누렸던 뭉크는 1944년 1월 23일 세상을 떠났다."뭉크는 인간을 탐구하기 위해 고갱처럼 타히티로 떠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내면에는 자신만의 타히티가 있다." 뭉크의 예술세계는 제임스 앙소르나 귀스타브 모로 같은 당시의 다른 상징주의 화가들보다 훨씬 '주관적'이고 '개인적'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더욱 긴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다. 앙소르는 풍자화 전통에, 모로는 신화의 상징체계에 기대어 있지만 뭉크의 그림은 문화적 지식 없이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끝난 뒤 북경 국립미술관에 최초로 전시된 서구 미술작품이 뭉크의 그림이었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1890년에서 1908년 사이 뭉크는 표현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1909년 귀국한 후 그는 유럽 미술의 흐름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는 큐비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추상 등에 관심이 없었다. 어떤 비평가들은 뭉크의 후기 작품들이 ‘아방가르드’가 아니라는 이유로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은둔 이후로 죽기 전까지 그의 자화상들은 전보다 훨씬 편안하고 감각적이었다. 이 그림들에는 뭉크의 기법적 숙련과 다양한 실험이 드러나 있다. 뭉크의 그림은 단번에 격정적으로 그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갈등과 감정을 포착해내기 위해 여러 차례의 습작을 거쳐 세심하게 화면을 구성했다. 인물의 자세는 심리 상태를 최대한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도록 선택되었다. 그들은 순수한 감정 자체를 굳혀낸 듯 정적이고도 극적인 모습으로 캔버스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듯하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어떻게 캔버스에 담아내야 하는지 알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과감히 다른 모든 요소를 무시해버렸다. 그의 작품이 그토록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뭉크의 자화상은 한 회의주의자의 고백이자 역할극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적 모순은 시대의 분열을 반영한다. 이 그림들은 예술과 종교와 사회가 끊임없이 변하던 시기에 화가가 처한 현실에 대한 주관적 반응이었다. 소시민 사회에도 예술가 사회에도 적응하지 못한 한 인간의 모습이 그의 자화상에 담겨 있다. 고독을 삶의 조건으로 선택하고 그 안에서 자아 정체성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뭉크는 현대인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삶을 이해하려는 끝없는 열망으로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했다. 이 점이 뭉크의 자화상을 주관적인 고백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나는 미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내 자신에게 납득시키려고 한다. 나의 그림은 자발적인 고백이며,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다.하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 비엔나 1900년
    비엔나 1900년
    19세기말 그 매혹적인 도시의 삶과 예술 그리고 문화를 읽다 
    저자
    크리스티안 브란트슈태터외
    역자
    박수철
    정가 45,000원
    판매가 42,750원 (5% 할인, 적립금 2,250p)

    1900년부터 1910년까지 비엔나는 지적 측면에서 세계적 중심지 중 하나였으나 정작 비엔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비엔나는 공명판(共鳴板)이 아니었다. 비엔나에서는 2~3천 명의 사람들이 다가올 세대의 세계를 뒤흔들 만한 말과 생각을 내놓았다.- 오토 프리틀랜더, 《동화 같은 도시의 마지막 광채》세기의 예술가를 탄생시킨 단 하나의 도시, 비엔나 19세기말 그 매혹적인 도시의 삶과 예술 그리고 문화를 읽다1800년이 끝나고 1900년이 시작되던 그 시기, 세기말에서 세기초로 넘어가던 그 몇십 년은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새로운 문화가 태동한 시기였다. 세기말의 비엔나는 새로운 사상과 개념의 실험실이자 미술 · 건축 · 음악 · 철학 · 문학 · 정신의학 등의 분야에서 활약한 유럽 전위파의 집결지였다. 그 화려한 유럽의 수도는 염세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상황에서 아주 특이한 문화적 동요가 일어났으며 미증유의 탐험과 예술적인 혁신이 이루어진 무대였다. 세기말 비엔나의 문화적 대폭발은 백 년이 지난 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니, 지금의 미술 · 철학 · 정신의학 등 대부분의 학문이 바로 이 시기로부터 이어져 21세기의 학문적 · 예술적 진보를 가능케 했다. 이러한 문화적 동요가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비엔나 1900년》은 그 뿌리를 찾기 위해 19세기말 비엔나로 들어가 당시의 사회적 · 정치적 분위기를 비롯한 시대적 흐름을 면밀히 살펴봤다. 더불어 이 책은 그 놀라운 도시와 그곳을 주름 잡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개인과 공공기관이 소장한 700점 이상의 채색화 · 데생 · 포스터 · 사진 등으로 화려하게 소개한다. 예술가들 간의 유기적이고 긴밀한 관계 속에서 탄생한 세기말 비엔나의 삶과 예술 그리고 문화를 ‘지금, 여기’에서 다시 보자.“비엔나를 가리켜 ‘음악의 도시’라고 부르는 조심성 없는 말은 음악이 아닌 다른 예술 장르에 얼마나 오만하였던가? 비엔나는 미술과 공예, 건축과 디자인의 도시이자, 문학과 철학 그리고 심리학의 도시였다. 그 엄청난 정신의 덩어리들이 온 비엔나 시내를 채우고 있다. 변방에서 온 나그네에게 그것들은 그야말로 도전해야 할 지성의 숙제들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즉 ‘세기말’이라고 부르는 1900년을 전후로 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얼마나 많은 예술들이 바로 백 년 전의 비엔나에서 나왔던가. 미술의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건축의 바그너, 올브리히, 호프만, 로스, 음악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요한 슈트라우스, 말러, 볼프,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문학의 호프만슈탈, 슈니츨러, 크라우스 등이 다 당시 비엔나에서 활약한 사람들이다. 그뿐인가? 비트겐슈타인 등의 철학자와 프로이트 등의 정신분석학자들의 고향도 비엔나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1900년 비엔나에는 이들이 다 함께 살았다. 그들 대부분은 다각적인 심미안을 가진 르네상스적 인물들이었다. 1900년의 비엔나를 안다는 것은 근대의 예술과 인문의 근원을 아는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예술의 토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책은 비엔나란 도시의 진정한 진가를 알게 해 줄 것이다. 더불어 이 책은 유럽이라고 하면 파리나 런던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문화 예술에 과도하게 쏠려 있는 우리의 편식에도 새로운 자극이 될 것으로 믿는다.” 풍월당 대표, 문화예술 저술가, 정신과 전문의박종호 세계의 역사를 이끈 인물들의 도시, 비엔나 후고 볼프,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같은 선구적인 음악가들을 낳은 음악의 도시 비엔나.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의 비엔나는 왈츠와 교향곡의 도시인 동시에 미술과 건축과 문학과 철학과 정신의학이 탄생한, 인간의 모든 정신적 산물이 집결한 문화의 도시였다. 오늘날 전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키스>를 그린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그리고 그를 회장으로 추대한 오스트리아 예술가협회 즉 ‘분리파’의 결성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의 예술과 문화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정표를 찍게 된다. 클림트를 비롯해 분리파에 가담한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 요제프 호프만, 아돌프 로스 등)을 필두로, 공예 · 판화 · 그래픽 아트 · 제본 등의 분야를 종횡 무진한 빈 공방(Wiener Werkstätte)의 영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클림트 그룹의 이탈이 있기 전까지 분리파가 활동한 ‘빛나는 7년’은 다시는 필적하지 못할 수준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시기였다. 분리파 회원들이 6년에 걸쳐 공식 간행한 기관지인 《성스러운 봄》 역시 분리파의 초기 역사를 가장 의미심장하게 보여 주는 지표였다. 더불어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그림은 오직 세기말의 비엔나를 상징하듯 어느 시대에서도 보지 못할 독창적이고도 내면지향적인 작품이었다. 이어 “가장 진보적인 진보주의자, 가장 현대적인 현대인, 가장 분리파다운 분리파 회원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건축가 오토 바그너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특유의 건축 양식을 창조해낸 인물이다.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요제프 호프만, 아돌프 로스도 기억할만한 세기말 비엔나의 건축가들이다. 후고 폰 호프만슈탈, 리하르트 베어-호프만, 헤르만 바르, 페터 알텐베르크, 카를 크라우스 같은 작가들과 시온주의의 창시자인 테오도르 헤르츨, 단막극을 통해 병리학적 감정을 냉소적으로 진단한 극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 현대 의학 사상을 새로운 길을 연 개척자이자 정신 의학의 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프레트 아들러, 빌헬름 라이히, 그리고 언어철학을 선도한 프리츠 마우트너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더불어 전 유럽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아돌프 히틀러까지 모두 비엔나의 황금기를 거쳐 간 인물들이다. 카페 문인이란? 카페 밖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문제를 카페에 앉아 깊이 생각할 시간이 있는 사람이다.안톤 쿠, 《폰 괴테의 추락》새로운 문화를 태동한 장소, 카페 이 각 계의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은 그들의 보금자리이자 세기말 비엔나의 상징적인 장소인 ‘카페’에서 수시로 교류하며 그들의 사고와 정체성을 확장시켜 나갔다. 1836년에 아돌프 글라스브레너는 “비엔나에서 당신이 ‘어디서?’라고 물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카페에서’이다. 이곳 카페의 유별난 점은 귀족적 분위기가 아니라 지인, 친구, 비슷한 성향의 사람 등을 만나는 편안함이다.”라도 기록하기도 했다. 그가 이 글을 쓴 시점은 비엔나의 카페가 중산계급 문화생활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비더마이어 시대였다. 그러한 세계관은 1847년에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이 카페 질베르네스의 전통을 물려받을 때까지 변함없이 남아 있었다. 혁명이 일어난 1848년,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은 이미 비엔나에서 가장 중요한 카페가 되었고, ‘국민 카페(Nationalcafé)’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0년 뒤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은 시인과 비평가,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 등이 경찰 첩보원들의 밀착 감시를 받으며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1880년대에는 사회민주당원들이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에서 교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890년에는 비엔나 데카당파가 헤르만 바르의 정규 모임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이후 문학 동아리 청년 빈 파를 결성함으로써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의 전설을 만들어 냈다.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을 거점으로 한 시인들이 비엔나 문학사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대 가운데 하나를 이끌었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훗날 크라우스는 “다른 어느 곳보다 문학 활동의 요람 역할이 된 이 카페에서는 여러 가지 병적 집착과 흥분이 동반되는 직업이 재현되었다. 하나 이상의 미덕 덕분에 이 오래된 카페는 문학사에서 확실한 영광의 장소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의 후계자는 카페 첸트랄로서, 알텐베르크부터 츠바이크까지 이어지는 카페 첸트랄의 손님 명단은 마치 온갖 문학운동세력을 망라한 세기말 비엔나의 문학계를 보여 주는 안내서 같았다. 당시 비엔나의 카페 문학이 누린 대단한 유명세는 1910년에 슈테판 츠바이크가 헤르만 헤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된다. “적어도 베를린 사람들을 관찰한 바에 비춰볼 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비엔나 문학 하면 날마다 모두가 둘러앉아 있는 카페의 커다란 탁자를 떠올리는 것으로 보입니다.”1900년, 비엔나에는 약 600개의 카페가 있었다. 카페 무제움(1899년)도 그중 하나였다. 아돌프 로스가 디자인한 카페 무제움의 엄격하고 기능이 강조된 장식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고, ‘허무주의 카페’라는 인기 있는 별명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카페 란트만 암 링(1872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곳은 펠릭스 잘텐, 테오도어 헤르츨, 그리고 그곳에서 타로 카드 점치기를 좋아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명사들을 비롯한 여러 정치인들과 배우들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비엔나에서 카페 문화는 세기전환기의 예술적・지적 삶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곳에서 문학사조가 탄생하고 소멸했으며, 정치와 과학이 논의되었고, 새로운 양식의 회화・음악・건축 등이 태동한 것이다.미에서 도덕으로, 도덕에서 정치로 오늘날의 시각에서 비엔나라는 도시와 비엔나의 황금기였던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의 문화가 높게 평가 받는 것과는 달리, 1920년대의 시각에서는 추상과 순수주의에 심취한 장식이 역겨울 정도로 달콤하고 정교하게 조합된 예술이라고 비판했다. 더욱이 국제적인 감각을 갖추고 세계적인 차원의 의사소통에 능숙했던 1920년대의 비평가들은 무엇보다도 그 빛나는 문화를 낳은 오스트리아를 촌스러운 존재로 인식했다. 그러나 세기말의 비엔나는 진정한 새 시대가 펼쳐진 곳이었다. 동시대의 화가・음악가・작가・건축가 등은 상호참조적인 연결망으로 인해 언제나 다른 분야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살펴보며 경쟁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다. 세기전환기 비엔나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은 개별적이면서 독자적이고 심지어 독창적인 위치라기보다는 ‘지속적인 거부 상태에 있는 자기중심적 존재들의 축적물’에 가깝다. 우리 입장에서 그것은 구예술과 신예술 사이의 싸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성향, 즉 영리적 성향과 예술적 성향 사이의 싸움에 관한 것이다. 영리냐 예술이냐. 그것이 바로 분리파가 던지는 질문이다.- 헤르만 바르 예술사적 관점에서 흔히 유겐트슈틸과 비엔나 분리파는 내면으로의 이동, 즉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의 후퇴에 대한 양식적・미적 표현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처음 소수의 예술가들을 전통주의, 절충주의, 과도한 역사주의 등에 맞선 낭만적 저항으로 이끈 지배적인 추진력은 당대의 조건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팽배하던 자본주의와 성공지향적 풍조에 불만을 품은 분리파는 이에 반발하면서 진보에 대한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생겨난 여러 공예업체들, 그중 빈 공방은 ‘취향의 귀족화’ 다시 말해 특권계급만 가질 수 있는 사치품의 생산에 기여하고 말았다. 장인의 수준 높은 기교와 기계에 의한 단순한 생산을 차별하는 태도는, 분리파의 양식화 의지가 산업시대를 맞아 쓸모없고 구시대적으로 전락한 수동생산에 예술적 품위를 선사하는 빌미가 된 것이었다. ‘죽은’ 기계 작업과 ‘살아 있는’ 수공예 사이의 투박한 대립은 이후 오랫동안 비엔나에서 치열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현대적인 산업 발전을 향한 적대감과 현실과 유리되는 명백한 태도는 비엔나 양식의 보수주의와 고립주의, 엘리트주의와, 비민주주의 특질로 이어지게 된다. 순수주의를 향한 이들의 열망은 비엔나를 진정한 새 시대로 여는 동시에 결국 20년 뒤의 비평가들이 당시의 역사를 공격하게 만든 업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비엔나의 예술은 후기에 이르러 열성분자, 순수주의자, 엄격주의자 등의 급진적인 분열로 이어졌고, 그것은 곧 1900년 전후의 비엔나라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었다. 비엔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많은 인물들이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사회심리적으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2년 동안 뤼거가 비엔나 시장에 선출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애썼지만, 분리파가 태동한 해인 1897년에 이르러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아마 세기전환기의 비엔나 역사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열성분자들의 진입을 막으려는 헛된 시도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화가 가장 확실하게 혜택을 입었고, 또한 그것 때문에 결국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미적 영역에서 시작된 것이 도덕적 영역으로 이동하더니, 결국 정치적 역할로 번진 것이다.“바꿀 수 없다면 잊고 사는 게 행복하지요Glücklich ist, wer vergisst, was doch nicht zu ändern ist.”- 슈트라우스의 <박쥐> 1막 피날레 중 세기의 끝에서 타오르는 여명   《비엔나 1900년》은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탄생한 시기이자, 유럽 전위파의 집결지였던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당시 비엔나를 주름잡은 역사적 인물들의 사상과 업적을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생소한 자료들과 함께 당시의 풍경을 정밀하게 분석했다. 음악의 도시로만 알려졌던 비엔나의 미술 · 건축 · 공예 · 판화 · 그래픽 아트 · 북디자인 · 패션 · 건축 · 문학 · 음악 · 과학 · 정신분석학 등 모든 분야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주목할 만한 사상과 인물들이 바로 이 작은 도시 비엔나에서 그것도 동시대에 탄생했다는 것은 가히 경이롭고도 되새겨볼만한 사건이다. 빈 공방, 빈 분리파 등 대표적인 예술가 집단을 비롯해 비엔나 악우협회, 비엔나 예술전람회 등등 각 분야의 인물들이 변화를 추구하는 시대적 조류와 맞물려 어떠한 사회적 활동을 하고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 받는 문화적 산물을 창조해낼 수 있었는지 면밀히 관찰할 수 있다. ‘총체예술’이라는 이념 아래 모든 분야가 얽히고설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쌍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 시대의 예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예술, 문화, 삶’ 이 3박자의 불가분 관계를 통해 문화적 동요가 극명하게 일어난 1900년대 전후의 비엔나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해 보는 시간이다.

  • 그림속의 강아지
    그림속의 강아지
    예술작품으로 살피는 개와 인간의 사회사 
    저자
    스테파노 추피
    역자
    김희정
    정가 25,000원
    판매가 23,750원 (5% 할인, 적립금 1,250p)

    예술작품으로 살피는 개와 인간의 사회사인간과 개의 친밀한 역사는 무려 1만 4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충성스러운 눈빛과  따뜻한 감촉, 언제나 주인의 기분을 살피는 사려 깊은 성격 등 우리는 개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감동을 받는다. 인류가 키웠던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개는 유일하게 인간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며 함께 살아왔다. 이러한 개에 대한 인간의 각별한 애정은 미술의 역사 안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모네, 르누아르, 벨라스케스, 루벤스, 피카소 등 수많은 거장들이 화려한 화폭에 개의 모습을 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때로는 왕의 옆자리를, 때로는 비천한 자들의 곁을 지키는 그림 속의 개들은 서양미술의 많은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만일 당신이 굶주린 개를 데리고 와서 정성껏 보살핀다면그 개는 절대로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바로 이 점이 사람과 개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 마크 트웨인 인류 문화에 가장 깊이 뿌리내린 동물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 호메로스의《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충견 아르고스 등 문학과 예술 안에서 개의 역사는 매우 깊다. 서사시《오디세이아》를 보면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영웅 오디세우스를 유일하게 늙은 개 아르고스만이 알아보는 장면이 있다.“엎드려 있던 개는 오디세우스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반가운 마음에 두 귀를 내리고 꼬리를 흔들었지만, 기운이 없어서 주인에게 달려가지 못했다. 오디세우스는 눈물을 흘렸다. 충직한 아르고스는 20년 만에 돌아온 주인을 보고는 비로소 두 눈을 감고 숨을 거두었다.”고대 이집트 무덤에서는 주인과 함께 묻힌 개의 미라, 로마 제국의 도시 폼페이 유적에서는 화산이 폭발하던 순간 주인의 곁을 지킨 개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동양에서는 고대 중국에서 12간지의 동물 중 하나로 개가 신성시되어 일찍이 1세기 무렵부터 조각상이 만들어졌다. 인류 역사 초기에 개는 애완이 아닌 사냥과 목축이라는 실용적인 임무를 맡고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고대 작품에서 개들은 집을 지키거나 주인과 함께 사냥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특히 그리스의 채색 도자기나 이집트 왕가의 황금 장식품을 보면 주인과 함께 들판을 달리는 활기찬 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사냥개’로서 표현된 개의 도상은 이후 18세기까지 중요하게 이어지는데, 특히 중세와 르네상스의 귀족들 사이에서 사냥이 필수 교양으로 장려되면서 작품 안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생존을 위한 가장 훌륭한 사냥꾼사실 인간이 가정에서 애완견을 키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중세까지 인간 사회에 ‘애완견’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개는 오로지 사냥과 수색을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종교적 엄숙함을 강조한 중세 분위기 탓에 그림에 동물을 그리는 일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개는 사냥 장면이나 일부 수도회나 성인들의 일화에 한정적으로 그려졌다. 당시 개와 함께 묘사된 단골 성인은 순례자들의 수호자인 로코 성인이다. 로코 성인을 소재로 한 그림에는 언제나 빵을 물고 있는 귀여운 개가 함께 등장하는데, 흑사병에 걸려 홀로 앓고 있는 가엾은 성인을 이 개가 돌봐주었다고 한다. 이후 중세와 르네상스의 귀족 남성들 사이에서 필수 교양으로 사냥이 큰 인기를 끌면서 예술작품에 사냥개 무리가 더욱 자주 그려지게 되었다. 좋은 혈통으로 잘 훈련된 사냥개들은 아름답게 장식되어 책에 실린 세밀화부터 궁전을 장식한 프레스코 벽화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의 거의 모든 미술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개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이탈리아 만토바의 곤차가 집안은 궁전을 장식한 프레스코화에 개들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그 후에도 사냥개들은 유럽 왕실과 지배층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오랜 품종개량을 통해 작고 귀여운 애완견이 나타나게 되면서 이제 개들은 가족의 일원이 되어 부르주아 가정의 안방까지 차지하게 되었다.왕실의 품격, 부르주아 가정의 귀염둥이고양이를 비롯한 다른 동물들과 달리 개는 일찍이 유럽의 왕실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고귀한 가문의 개들은 마치 사람처럼 단독 초상화로 그려지기도 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그 후의 왕들은 자신이 아끼는 개를 쓰다듬으며 초상화 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18세기 유럽에서는 왕실 초상화에 개들이 공식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영국과 스페인의 궁정 화가였던 안토니 반 다이크와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군주 옆에 다양한 개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개에 관한 이러한 선호 풍조는 18세기 중반부터 극치에 달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개를 기리는 무덤이 눈에 띄게 증가했으며, 유명 건축가가 개집의 설계를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유행처럼 번진 개 무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대립을 악화시키는 구실이 되기까지 했다.이후 개는 점차 도시와 부르주아 가정이라는 새로운 공간 속으로도 들어오게 되었다. 르네상스 회화에서 우리는 고양이와 담비, 앵무새, 이국적인 외모의 표범 등 많은 종류의 애완동물을 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강아지는 다른 동물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지난 수세기 동안 사냥개가 귀족의 신분을 상징하며 스포츠를 좋아하는 왕이나 귀족들의 옆자리를 장식하는 고전적인 역할을 했다면, 근세의 애완견들은 정다운 가족의 일원으로서 사람들과 일상의 즐거움을 함께 했다. 인상주의나 사실주의를 비롯한 당시의 예술 작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장식품이 아닌, 마치 인간처럼 대우받는 개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기쁨을 선사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현대에 들어와 개와 강아지는 회화를 넘어 사진, 만화,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다. 이제 개는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일상의 행복감을 전하는 마스코트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축음기 광고에 등장한 강아지 니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니퍼의 옛 주인은 살아있었을 때, 취미로 축음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곤 했었다. 어느 날 화가는 축음기의 나팔관 안을 들여다보며 죽은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니퍼를 보게 되었고 이에 감명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899년에 한 축음기 회사에서 이 그림을 사들여 광고에 활용하였다. 애틋한 니퍼의 모습은 이후 음악 산업의 아이콘이 될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외에도 정다운 풍경을 주로 그린 화가 노먼 록웰의 삽화에 등장하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강아지, 앤디 워홀의 판화 속 명랑한 푸들, 만화 <피너츠>의 주인공 스누피와 영화 <101 달마티안>에 등장하는 강아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따뜻한 행복감에 젖어들게 한다. 지난 수천 년 간 미술의 역사에서 이어져온 개와 강아지의 다양한 도상을 감상하며, 우리는 인간과 개가 나눈 끈끈하고 오랜 우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에서 지금까지, 언제나 우리의 곁을 지켜온 그림 속 이 사랑스러운 동물의 모습에서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될 것이다.당신이 우울할 때 곁에 있는 개가 위로가 되는 것은그들에게 아무런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서양 격언) 

  • I,Michelangelo (미켈란젤로가 말하는 미켈란젤로의 삶과 예술)
    I,Michelangelo (미켈란젤로가 말하는 미켈란젤로의 삶과 예술)
    미켈란젤로의 육성으로 직접 듣는 예술가의 인생과 작품 세계 
    저자
    제오르자 일레츠코
    역자
    최기득
    정가 38,000원
    판매가 36,100원 (5% 할인, 적립금 1,900p)

    얼마 전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가 권위 있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는 고통스럽고 어두운 인간의 내면을 희생당한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모티브로 풀어낸 작품이다. 원래 ‘피에타’란 기독교 미술에서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체를 무릎 위에 놓고 애도하는 마리아를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이 주제는 중세 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일 것이다. 대리석을 깎아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끈한 입체감과 작품 주위를 맴도는 특유의 경건하고 아름다운 분위기 때문에 이 작품은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찬사를 받았다. 때마침 내년 3월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바티칸 박물관전’을 방문하면 국내에서도 <피에타>를 감상할 수가 있다고 하니 더욱 반가운 소식이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 <피에타>를 만든 미켈란젤로는 과연 어떤 예술가였을까. 조각가만으로 평가하기에 그는 너무나 다재다능한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미켈란젤로의 육성으로 직접 듣는 예술가의 인생과 작품 세계!예술가가 남긴 말과 글을 통해 생애와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I, 시리즈는 2007년 《I, van Gogh》를 시작으로 2008년 《I, Goya》, 2009년 《I, Raffaello》, 2010년 《I, Tiziano》로 이어지며 애장판 특별 한정본으로 출간되어 미술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2012년 I,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할 예술가는 바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예술가’ 미켈란젤로다. “예술 작품이란 그저 신성하고 완전무결한 창조주의 그림자일 뿐이다.”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와 더불어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뛰어난 조각가로 유명했던 그는 화가와 건축가로서도 두각을 드러낸 진정한 르네상스형 예술가였다. 《I, Michelangelo》는 250x330mm의 대형 판형으로 제작되었으며, 작품의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살린 도판들은 독자로 하여금 마치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눈앞에서 감상하는 듯한 황홀경에 빠지게 할 것이다. 천재 예술가의 탄생“신께서는 내가 성취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열망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15세 때 이미 조각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았던 미켈란젤로는 청소년기를 메디치 가에 머물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그가 로렌초 데 메디치의 눈에 들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로렌초는 어린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궁 정원에 만들어 놓았던 늙은 목신상이 너무 건강한 모습이라며 지적했고, 이를 듣자마자 미켈란젤로는 목신의 이 하나를 부수고 잇몸을 파내어 완벽한 노인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그의 대표 조각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피에타>역시 20대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교함과 입체감을 자랑한다. 그는 1500년에 완성한 이 작품을 자랑스러워한 나머지, 드물게도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이 작품을 만들었음’이라는 문구를 성모상의 가느다란 어깨끈 위에 새겨놓았다. 그런가 하면 <다비드>상에는 청년 특유의 야망, 과감성, 품위와 자신감을 불어넣었는데, 이는 당시 로마의 광장을 돌아다니던 청년들의 분위기를 치밀하게 관찰하여 조각에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작업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손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면 수치스러운 결과가 나옵니다.”미켈란젤로는 깊은 산 속의 채석장에 찾아가 자신이 쓸 대리석을 직접 고를 정도로 열정적인 조각가였으며, 이후 많은 귀족들과 교황청의 의뢰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괴팍한 성격 탓에 교황 율리우스 2세와의 관계가 틀어졌고, 이 과정에서 강압적으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작업을 떠맡게 되었다. 프레스코 천장화는 자신의 특기인 조각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시스티나 예배당의 그림은 이미 여러 차례 선대 화가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그림이 덧칠해지고도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런 골칫덩어리 벽화 작업을 맡게 된 미켈란젤로는 몹시 절망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이 작품은 그의 인생과 르네상스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걸작이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밥을 먹을 시간조차 없는” 고된 작업을 묵묵히 이어갔다.“이 일의 압박감 때문에 생긴 갑상선종 (...) 내 동그란 배는 이제 턱 밑까지 짓눌렸네. / (...) 쉼 없이 움직이는 붓과 뚝뚝 떨어지는 물감은, / 내 얼굴을 멋진 마룻바닥처럼 만들었지. / (...) 나는 확실하지도 보이지도 않는 길을 묵묵히 가고 있네. / (...) 조반니, 이리 와서 구해주게, / 죽어버린 내 그림과 나의 명예를. / 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어, 이제 화가라고 할 수도 없다네.”-시스티나 천장화 작업 당시 조반니 디 피스토이아에게 보낸 소네트, 1509-10“나는 화가라도고 할 수 없다”는 대목에서, 미켈란젤로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분야에 재능을 허비해야 하는 상황에 분개하고 절망한 고통스러움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막상 일에 착수한 미켈란젤로는 일차원적인 회화 구조에 자신의 특기인 조각의 요소를 적용하여, 입체감이 넘치는 천장화를 완성해냈다. 어떠한 일이든 일단 시작한 일은 끈기 있게 연구하는 예술가로서의 그의 강렬한 의지가 돋보인다. 이 일을 마치자 그는 회화와 조각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조각은 덜어내는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반면 회화는 덧붙이는 방법으로 만들어진다.”건축가로서 나아가다“모든 예술가들은 미켈란젤로에게 빚을 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전통적인 형식의 사슬을 모두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미술사가 바사리미켈란젤로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면서 뛰어난 건축가이기도 했다. 미술사가 바사리는 미켈란젤로 건축의 첫 번째 특징으로 바로 ‘독창성’을 꼽는다. 그가 디자인한 메디치 가문의 예배당과 묘소, 도서관을 보면 마치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 하나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일찍이 르네상스 이전부터 선배들이 이뤄놓은 각종 건축적 관습들이 있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독창적인 공간을 창조하려고 애썼다. 물론 여기에서도 중심이 된 기준은 바로 그의 본업인 ‘조각’의 개념이었다. 그는 공간의 형태를 잡을 때 무엇보다 조각적인 입체감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메디치 예배당의 화려한 부조상과 아름다운 도서관 공간의 창조로 이어졌다. 마침내 미술계에서 교황에 버금가는 지위와 권력을 획득하게 된 말년의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과업은 바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이전에 시스티나 천장화가 그러했듯이 성 베드로 성당 역시 브라만테, 라파엘로와 같은 많은 예술가와 건축가들의 손을 거쳤으며 수없이 계획이 변경되었던 두서없는 공사 작업이었다. 그는 십자가 모양의 기존 설계를 대폭 축소하고 복잡한 형상이 아닌 커다란 돔을 통한 단일한 입체감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가 조각처럼 배열한 성당의 거대한 벽기둥들은 건물 전체를 시각적으로 결합하는 동시에 건물의 수직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삶이 끝나가는 순간까지도 미켈란젤로는 그의 마지막 미완성 작품에 매달렸으며 이 고통스러운 사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않은 채 로마에 머물렀다. 비록 죽음으로 인해 공사의 마지막까지 지켜보지는 못했으나 미켈란젤로는 결코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공사를 그만두는 것은 지난 10년 동안 내가 신의 사랑을 위해 바친 모든 노동을 쓰레기로 만드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유쾌한 생활인 미켈란젤로“나는 장사꾼 같은 화가로 또는 조각가로 살지 않았다. 비록 내가 세 명의 교황에게 봉사했지만, 나는 내 아버지와 형제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항상 조심해 왔다.”그는 세 명의 교황을 모셨으며 말년에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칙령으로 인해 예술가로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삶이 젊은 시절부터 순탄하게 흘러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작업을 해야 했으며 구두 하나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신고 다닐 정도로 언제나 지저분한 행색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삶의 작은 순간들을 즐기고 만끽할 줄 아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한 친구들과 종종 장난스러운 파티를 벌였으며,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종종 애정 어린 편지와 시를 지어 보냈다. 특히 지혜로운 여성 비토리아 콜론나와 귀족 청년 토마스 카발리에리를 향한 흠모의 마음을 공공연히 자신의 시 속에 드러냈다. 또한 프레스코 벽화인 <최후의 만찬>에서 가죽이 벗겨져 껍데기만 남은 성 바르톨로메오의 모습을 자신과 닮게 그림으로써 연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의 운명이 되기를 원하네 / 주인의 살아 있는 몸을 나의 죽은 가죽으로 감싸기를.” -토마스 카발리에리를 위한 소네트 일부한편 상업가이자 귀족 집안이었던 부오나로티 가문의 일원으로서 미켈란젤로는 꼼꼼한 금전 감각을 지닌 사업가였다. 자신이 소유한 토스카나 경작지에서 나온 배 한 궤짝을 받고 그 중에서 좋은 것들만 골라 교황에게 보내는가 하면, 집안의 세세한 행사와 청구서까지도 직접 챙겼다. 중년 이후에 어느 정도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자 집안의 가장으로서 친척들의 생활비를 후원하기도 했다. 《I, Michelangelo》는 생활인으로서, 예술가로서, 건축가로서 미켈란젤로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여기에 연대별 작품 목록과 도판, 각 소장처를 수록하였으며 그와 관련된 풍부한 참고 자료를 함께 엮었다. 이 책을 읽는 미술애호가와 입문자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르네상스 미술 여행을 선사할 것이다. 

  • 그림속의 고양이
    그림속의 고양이
    인간의 곁에, 그림 속에 머물러 온 고양이들의 이야기
    저자
    스테파노 추피
    역자
    윤인복
    정가 25,000원
    판매가 23,750원 (5% 할인, 적립금 1,250p)

    호화로운 귀족의 저택, 소박한 농부의 오두막,가진 것 하나 없는 부랑자의 품 속에서도, 변함없이 신비로운 눈빛과 부드러운 감촉으로인간의 곁에, 그림 속에 머물러 온 고양이들의 이야기고양이들이 오해를 받는 것은, 단지 그들 자신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폴 모랑, 프랑스 작가5천 년 동안 모든 대륙에서, 모든 사회와 계급의 집 안에서 고양이는 인간과 함께해왔다. 하지만 고양이는 실내에 살면서도 ‘애완동물’이 되지 않는 자존심을 지녔으며, 그 평온한 눈동자는 순식간에 사납게 변하기도 한다.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 어둠 속에 반짝이는 시선은 온갖 진실들을 꿰뚫어 보는 듯 마술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고양이가 아홉 개의 목숨을 가졌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한편 고양이의 귀족적인 면모, 소리 없고 부드럽고 우아한 움직임, 깔끔한 모습은 우리를 매혹시킨다. 고양이는 특별히 실용적인 일을 배운 적이 없다. 고양이는 개와 달리 집 지키기, 사냥, 목축 같은 용도가 정해지지 않는다. 흔히 개는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주인의 필요에 적응하는 ‘충실한’ 동물로 여겨진다. 반대로 고양이에게는 ‘게으른, 호기심 많은, 교활한, 거만한’ 같은 말들이 따라붙는다. 그래서인지 개는 ‘단지 말만 못할 뿐’ 인간과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다고들 얘기하지만, 고양이의 심리나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사례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신비로움이 고양이의 가장 큰 매력이자, 예술가들이 수많은 그림과 글을 남기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어쩌면 인간이 고양이를 길들이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고대 이집트 신의 모습일 때처럼 그 매력을 온전하게 드러낸 적이 없다.- P. G. 우드하우스, 영국 소설가《천년의 그림여행》으로 잘 알려진 스테파노 추피는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인류 역사를 통틀어 미술작품, 특히 그림에서 고양이가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설명한다. 미술사 전체를 보여줄 수 있도록 세심하게 고른 200여 점의 도판들은 다빈치, 렘브란트, 샤르댕, 마네, 르누아르, 보나르, 마티스, 피카소 등 여러 화가들은 물론 이집트 조각, 폼페이 모자이크, 중세 채색삽화, 르네상스 종교화, 플랑드르 정물화, 일본 판화 등 다양한 문화와 기법을 아우른다. 물론 고양이가 언제나 주인공인 것은 아니다. 구석에 감춰져 있던 고양이가 재발견되기도 하며, 주제와 상관없어 보이는 무심한 모습의 고양이가 오히려 인상적인 이미지를 만들기도 한다. 그림 속 고양이를 따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세심한 편집 또한 미술 애호가와 애묘인 모두를 기쁘게 할 것이다.이야기는 고대 이집트에서 출발한다. 나일 강가에 문명이 발달하면서 쓰레기가 생겨나고 쥐가 들끓었다. 야생 고양이는 쥐를 사냥하는 습성으로 인해 인간 세계로 들어왔고,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가장 오래된 시각 자료에서 고양이는 인간의 사냥 동료로서 갈대숲에서 오리를 쫓고 있다. 우리가 아는 귀여운 고양이와는 다르지만, 뾰족한 귀와 얼룩덜룩한 무늬는 마찬가지다. 파피루스 그림에서 고양이는 사냥꾼답게 사랑스럽다기보다 영웅적이고 용감한 모습을 띠었으며, 《사자의 서》에는 괴물 뱀의 머리를 자르는 고양이가 등장하기도 한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고양이 여신 바스테트가 등장했다. 이 다산과 풍요의 여신을 위해 많은 조각과 부적이 제작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작품에서 새끼와 놀거나 젖을 먹이는 실제 어미 고양이의 모습이 묘사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고양이의 임신 기간은 2개월 이하이며 종종 한번에 여러 마리 새끼를 낳는다는 점이 바스테트 숭배의 이유였을 것이다. 이제 고양이는 단순한 사냥꾼이 아니라 가정의 수호신, 나아가 삶과 죽음의 동반자로 변해갔다. 많은 고양이 미라가 이집트 무덤에서 발견되며, 이는 이집트인들이 종종 자신의 고양이와 함께 저승에 가고 싶어 했음을 알려준다.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가장 생생한 고양이 이미지는 폼페이 주택의 모자이크에 남아 있다. 여기에서는 모성적 모습, 음식을 훔치거나 사납게 이를 드러낸 모습 등 다양한 면모들을 볼 수 있다. 그보다 적지만 새롭고 흥미로운 이미지는 아이들의 품에 안긴 고양이로, 이집트에서 잘 나타나지 않았던 인간과 고양이의 상호 보완적 애정관계를 드러낸다. 고양이는 이제 여신의 모습으로 등장하진 않았지만, 로마에서 검은 고양이는 밤의 여신의 비밀 의식에 연관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양이는 수 세기 동안 성행할 미신의 주제로 발전해나갔다. 반면 성서에서는 고양이가 언급되지 않는다.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도시에 살았던 것과 달리, 모세의 출애굽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유대 민족에게 당시는 척박한 땅에서의 이동과 유랑의 시대였다. 그들에게 이 가정적인 동물과 공존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고양이는 하나의 걸작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탈리아 화가중세에는 민족의 이동과 정치․경제적 불안정으로 많은 고양이들이 집을 잃었다. 거기다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밤중에 쥐와 음식 찌꺼기를 찾아 돌아다니는 고양이의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한편으로 ‘철학자’ 고양이의 이미지가 나타나기도 했다. 사냥꾼의 본성을 지녔지만 생선뼈를 물고 느긋하게 햇볕을 쬐는, 주인이 없지만 두려움도 없는 평화로운 동물로서. 시간이 흐르면서 고양이의 양면적 이미지는 더욱 뚜렷해졌다. 개와 고양이의 비교도 두드러져서,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개는 복종하는 모습으로 사도들과 함께, 고양이는 배신의 상징으로 유다의 곁에 묘사되곤 했다.하지만 고양이는 무엇보다 쥐를 잡아 부엌과 창고를 지켜주었다. 이는 쥐를 잡고 만족해하는 채색삽화 속의 고양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때문에 수도사들에게 고양이는 부정적 이미지를 넘어 유용하고 사랑스럽게 여겨졌으며, 중세의 고양이 이미지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아마도 베네딕트 수도원의 문서보관소 벽화일 것이다. 한편 수도사들은 풍부하고 다양한 소리를 내며 ‘노래’할 수 있는 고양이에게 감탄하여 찬송가책 귀퉁이에 여러 고양이 삽화를 남기기도 했다. 고전 문화를 부활시킨 르네상스는 평화로움, 신비, 고요함 등 고양이의 가치 또한 부활시켰다. 인문주의 학자들은 고양이가 ‘사악한’ 쥐를 심판한다고 여기진 않았지만, 독서와 명상 중에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이 집중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실내를 소리 없이 돌아다니는 고양이는 방해가 되지 않는 친구였다. 지식인들의 고양이 애호에 대해, 쥐가 동물 가죽으로 만든 당시의 책에 해를 끼쳤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사를 통틀어도 손꼽힐 만한 고양이 애호가이기도 했다. 그는 성모자와 고양이를 함께 담은 작품을 구상했지만 아쉽게도 이는 스케치로만 남아 있다. 내가 고양이와 놀 때 고양이가 나보다 더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고양이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나를 갖고 노는 것이 아닐까?- 미셸 드 몽테뉴, 프랑스 작가바로크 시대 그림에서 고양이는 비로소 농부의 오두막, 중산층의 저택, 귀족의 궁전 등 사회계급과 남녀노소를 막론한 집동물로 나타난다. 종교개혁과 개신교 분리 이후 가톨릭 국가에서 나타난 반종교개혁은 신자들의 실제 생활과 성서 내용의 유사함을 강조하려고 했다. 고양이는 성모 마리아의 곁에서 쉬는 모습으로 ‘수태고지’ 그림에 포함되었으며, 아기 예수가 새끼 고양이와 노는 ‘성가족’ 그림도 나타났다. 나아가 렘브란트 같은 세속회화 거장들도 고양이를 가정의 평화를 상징하는 데 쓰기 시작했다.유럽의 바로크 미술에 고양이를 유행시킨 나라는 특히 프랑스와 네덜란드였다. 프랑스의 권력을 한손에 쥐었던 리슐리외 주교는 고양이를 “인간이 매일 작은 호랑이를 쓰다듬을 수 있도록 신이 선사한 피조물”로 묘사했다. 고양이는 르 냉 형제의 풍속화에서 서민들의 친구였고, 르 브룅의 종교화에서는 예수의 운명을 암시했다. 네덜란드에서 고양이는 정물화에서 먹음직스러운 음식 주변을 맴돌거나 훔쳐내는 모습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유디트 레이스테르를 비롯한 여러 화가의 그림에서는 고양이와 함께 노는 아이들도 볼 수 있다. 한편 신대륙 아메리카로 배를 타고 떠난 청교도들도 어김없이 고양이를 데리고 있었다. 배의 저장실에서 쥐를 잡아주는 고양이는 항해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이런 역할은 이후로도 지속되어, 2차 세계대전 때만 해도 영국 해군 전함은 적어도 고양이를 서너 마리 이상 싣고 출항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하지만 미신에 민감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양이를 믿지 않았다. 일부 목사들은 생식기를 핥는 고양이의 습관이 외설스럽다고 했다. 근면하고 부유했던 네덜란드에서 고양이의 게으름은 이상적인 시민의 덕목에 완전히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고양이 세수’는 대충 닦는 것을 의미했고, ‘어둠 속에서 고양이를 꼬집다’라는 표현은 숨어서 짓는 죄를 의미했다. 이러한 수많은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고양이가 이 시대 가정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양이의 마음속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 월터 스코트, 영국 소설가로코코 시대의 고양이는 무엇보다도 여인들의 내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날렵한 몸매, 아몬드 모양의 눈 속에 반짝이는 변덕스러운 표정, 소리 없는 발걸음, 길게 몸을 늘이고 가르릉거리는 모습…… 부셰와 프라고나르는 고양이의 여성적 면모에 주목했고, 이를 섬세한 에로티즘으로 그림에 담았다. 이는 고양이와 소녀의 공동 초상화라는 형식으로 발전하여 지금까지도 인기를 끌고 있으며, 때로는 ‘암고양이’ 같은 팜 파탈의 캐릭터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했다.이 시대 영국은 회화의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자연에 대한 감수성, 동물들과의 따스한 유대감, 유럽 대륙과는 사뭇 다른 전원 풍경 등 영국 화가들은 국제 회화의 장에 새로운 분위기를 가져왔다. 18세기 영국의 고양이들은 부엌을 돌아다니거나 난롯가에서 조는 대신 사람들의 품에 안겨 있다. 오늘날에는 흔해빠진 모습이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현상이었다. 따스하고 감성적인 부르주아 가정 풍경이라는 이상적 이미지가 탄생한 것이다.18세기부터 유럽 지성인과 예술가들 사이에는 견문을 쌓기 위한 여행인 ‘그랑 투르’가 유행했고, 특히 이탈리아를 방문해 고대와 르네상스 문화를 공부하는 것이 필수로 여겨졌다.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신고전주의 열풍 속에 다시금 국제 문화의 모델이 되었지만, 한편 고양이들의 도시로 알려지기도 했다. 유랑하는 예술가들은 ‘영원의 도시’의 유적 사이로 배회하는 고양이 무리를 자신들과 동일시했고, 예술가 모임이나 이탈리아 풍경 및 풍속을 다룬 그림에 포함시켰다.고양이가 없는 집은 아마도 완벽한 집이 될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마크 트웨인, 미국 작가혁명으로 시작된 19세기는 보수적인 중산층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월터 스코트와 뒤마의 모험담, 쥘 베른의 공상과학소설, 스티븐슨과 콘래드의 여행기, 포와 호프만의 추리소설도 즐겼다. 안정과 낭만을 동시에 추구하는 당대의 분위기는 고양이의 양면성과 딱 들어맞았다. 무겁게 늘어진 커튼, 부드러운 양탄자, 벨벳으로 싸인 가구, 아이들의 장난감 상자…… 이처럼 평온한 가정 풍경에 고양이의 눈빛과 움직임은 작은 신비로움을 더했다.고양이의 까다로우며 자신에게 충실한 특성은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데 난관이 되기도 했다. 기차가 발전하면서 말은 교통수단 대신 시골 산책이나 여우 사냥, 경마 등 고상한 스포츠를 위한 동물이 되었다. 개는 왕실의 대표적 애완동물이자 공원과 대로에서 귀부인들의 산책에 동반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항상 집 안에 있었고, 아이나 여인네들에게 적당한 동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 고양이는 많은 미술작품에서 외로운 노인의 친구 혹은 가난한 아이들의 장난감으로서 ‘감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고상한 부르주아 사회는 고양이를 낮추어 보았지만, 얼마 후 인상주의 화가의 눈에 들어온 고양이들은 그들이 잠시 침체기를 맞았던 바로 그 이유, ‘평범한 가정의 따뜻함’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소재가 되었다. 마네와 르누아르, 베르트 모리조와 메리 커셋의 사랑을 받은 고양이는 개에 맞설 만큼 다시 세력을 키웠다. 이렇게 하여 고양이와 개를 둘러싼 논쟁이 돌아왔고, 둘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가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다는 관념은 현대의 심리 테스트에까지 지속되고 있다. 모리스 드니가 세잔에게 바친 그림이나 앙리 루소가 그린 작가 피에르 로티의 초상화에서, 고양이는 화가의 작업실 식구나 예술가들의 조용한 동반자로 묘사되기도 했다.개는 아래에서 우리를 올려다보고, 고양이는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단지 돼지만이 인간과 같은 눈높이를 가지고 있다.-윈스턴 처칠, 영국 정치가 20세기에 고양이가 거둔 성공은 놀랍다. 세기 초에 고양이는 파리의 카바레 ‘검은 고양이Le chat noir’의 마스코트로 쓰이는 등 밤과 아방가르드 문화를 상징하며 예술가와 지성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되었다. 이런 성공은 고양이의 신비로움에 주목한 상징주의 운동에도 힘입은 것이었다. 프란츠 마르크의 부드러운 곡선, 키르히너의 거친 표현주의, 샤갈의 목가적 이미지, 클레의 기하학적 형태, 카를로 카라의 정적인 형이상학, 피카소의 분할된 관점과 은근한 유머, 발튀스의 에로틱한 시점, 워홀의 단순화된 귀여움…… 현대에는 고양이를 그린 화가보다 그리지 않은 화가를 세는 것이 빠를 정도다. 자연스럽게 문학에서도 고양이에 대해 다양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 작가 T. S. 엘리어트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찾아주는 내용의 장편시 <캐츠>를 썼고, 프랑스 시인 장 콕토는 문명의 단계를 서술하면서 고양이를 함께 다루기도 했다. 검은 고양이는 악마의 보조자다.-인노켄티오 8세, 교황고양이는 독립적이고, 밤에 활동하고, 신비롭다는 이유로 전 세계에서 마녀와 악마와 연관된 편견의 대상이 되었다. 고양이에 대한 불길한 미신은 인간과 고양이의 관계에 지금까지 수많은 논쟁거리를 남겼으며, 때로는 박해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1232년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이단 심문소에서 검은 고양이를 경계할 것을 강조한 바 있고, 벨기에 이프레스의 ‘고양이 축제’에서는 수 세기 동안 고양이들이 시청 탑에서 내던져졌다. 이러한 미신은 중세를 넘어, 18세기 고야의 판화에서 악몽에 시달리는 화가의 등 뒤에 눈을 빛내는 고양이의 모습에까지 남아 있다. 하지만 고양이는 조금씩 천천히 승리를 향해 나아갔으며, 미술은 그 과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암암리에 남아 있는 대중의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꿋꿋이 목구멍을 가르릉거리며 가정의 평온과 즐거움, 안정을 상징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고양이의 수난과 부활의 역사를 따라 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우한 인간에게 최적의 은신처는 고양이와 음악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독일 철학자 

  • 여자, 그림으로 읽기(Art Guide 12)
    여자, 그림으로 읽기(Art Guide 12)
    여자, 그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하여  
    저자
    마르타 알바레스 곤잘레스・시모나 바르톨레나
    역자
    김현주
    정가 19,600원
    판매가 18,620원 (5% 할인, 적립금 980p)

    여자, 그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하여 이 세상에 ‘여자’만큼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또 다양한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피카소의 첫 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여자들에게 영감을 받아 작품을 창작하는 피카소를 가리켜 “피카소에게 여자란 회화에서 붓과 같은 것, 즉 없어서는 안 되는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가가 어디 피카소뿐이었겠는가. 고대 그리스인들을 비롯해서 보티첼리, 라파엘로, 렘브란트, 르누아르, 클림트,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앤디 워홀에 이르는 위대한 예술가들은 다채로운 여성의 세계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열을 불태웠다. 그렇다면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렘브란트의 그림 속 성모 마리아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스하다. 반면 적장 시스라 장군을 죽이기 위해 그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는 젠틸레스키의 그림 속 야엘은 한치의 흔들림 없는 굳세고 단호한 모습이다. 귀스타브 모로의 작품을 보자. 그의 그림 속에서 춤을 추는 살로메는 매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 의붓아버지를 유혹한 후 그 대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위험한 존재였다. 아, 이처럼 다양한 얼굴을 가진 ‘여자’를 우리는 무어라 정의내릴 수 있을까. 이 세상은 여자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여자, 그림으로 읽기》를 보다 보면 자연스레 여성을 바라보는 당대의 시각도 함께 읽을 수 있다. 중세 예술가들은 여자를 ‘인간을 원죄의 길로 빠지게 한 근본적인 책임자’라고 생각해서, 거의 악마와 동일시하여 표현했다. 또 여성의 최고 미덕은 ‘정숙’과 ‘순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를 완벽한 여성으로 숭상하여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남자는 바깥일을, 여자는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선입견은 그림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는데 옛 그림 속에서 여자들은 대부분 청소나 빨래, 부엌일 같은 집안일을 하고 있거나 아이를 돌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스테인은 지저분하고 어질러진 집을 그린 후 이는 그 집안 여성이 게으르고 나태하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시간이 흘러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도시화되면서 집 안에서만 머물던 여자들은 조금씩 바깥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빈첸초 캄피의 그림 속 주인공처럼 과일을 팔기도 하고,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의 그림 속 주인공처럼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며, 프랜시스 도드의 그림 속 여자들처럼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한다. 또 드가의 그림에서는 고된 노동에 지쳐 하품을 하는 여성 노동자를 만날 수 있으며,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의 그림 속 캉캉댄서들처럼 공연계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등장한다. ‘여성의 의무는 아이를 돌보고 남편을 뒷바라지 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이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나?1989년, 뉴욕에서 결성된 익명의 여성 예술가 모임인 게릴라 걸스는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를 패러디한 포스터를 선보였다. 여기에는 “여성이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나?” 라는 문구 아래 “미국 최대 미술관이라고 하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근대미술 부문에 여성 예술가의 작품이 5%만 걸려 있는 반면, 이 미술관에 걸린 누드화는 85%가 여성을 소재로 한 것”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게릴라 걸스는 남성중심의 주류 미술사에서 여성이 소유와 소비의 이미지로 전락한 것에 반기를 든 것이다.그렇다면 미술사에는 훌륭한 여성 예술가가 없었던 것인가? 아니다. 미술의 역사에는 ‘여자는 집 밖에서 활동해서는 안 된다’ ‘예술가로서의 프로의식과 예술적인 창의력은 절대적으로 남성에게만 국한된 것이다’와 같은 편견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던 뛰어난 여성 예술가들이 많이 있었다. 먼저 16세기 화가 플라우틸라 넬리는 전기작가 조르조 바사리가 자신의 책 《미술가 열전》에서 “그녀가 남자들처럼 편하게 공부하고, 생명체와 자연을 설계하고 디자인할 수 있었다면 훌륭한 작품들을 탄생시켰을 것이다”라고 극찬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였다. 그 이후에도 미술사 최초의 진정한 여성 프로예술가라 불리는 엘리자베스 비제-르브룅, 나폴레옹의 공식 초상화를 의뢰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마리-귈레망 브누아,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홀로 지냈지만 남성 화가들이 표현하지 못했던 감수성과 모성애를 그림에 담았던 메리 커셋,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열정적인 예술가 카미유 클로델과 프리다 칼로, 모델 활동을 하다가 혼자 미술을 배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수잔 발라동, 입체파와 전통 인물화가 섞인 개성적 화풍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타마라 드 렘피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루이즈 부르주아, 멀티미디어 기술을 통해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관습적 이미지를 우스꽝스럽게 비트는 피필로티 리스트 등 각자의 예술세계를 멋지게 펼쳐간 수많은 여성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 이제 그들에게 ‘여성’이라는 성(性)은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예술세계를 향한 디딤돌이 되었다. 그들은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생각들을 토대로 새로운 작품들을 탄생시키고 있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녀들의 활동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여자, 그림으로 읽기》, 아트가이드 시리즈를 매듭짓다《여자, 그림으로 읽기》는 그림에 얽힌 이야기와 구석구석 감춰진 비밀을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해주는 예경 아트가이드 시리즈를 매듭짓는 책이기도 하다(총 12권). ‘그림 속 이 여인은 왜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지?’‘은밀하게 속삭이는 두 남녀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왜 저 강아지는 그림 한 귀퉁이에 덩그러니 앉아 있지?’‘수많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거울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야?’이처럼 너무나 궁금했지만 그 어떤 책도 말해주지 않았던 그림 속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섬세하고 친절하게 짚어주는 아트가이드 시리즈가, 모든 이에게 미술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 톡톡톡(초보자를 위한 미술감상 토크쇼)
    톡톡톡(초보자를 위한 미술감상 토크쇼)
    미술관이 낯선 당신을 위한 톡톡톡! 초보자를 위한 재미있는 그림감상 토크쇼
    저자
    롤프 슐렝커, 지모네 로이터
    역자
    정연진
    정가 17,000원
    판매가 16,150원 (5% 할인, 적립금 850p)

    미술관이 낯선 당신을 위한 톡톡톡! 초보자를 위한 재미있는 그림감상 토크쇼미술감상은 어렵다? 익숙하지 않은 전시회나 미술관에 가면 왠지 어색하다. 다른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가며 작품을 하나씩 훑어보지만 눈앞에 걸린 그림은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물론 마음에 드는 작품이 간혹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책이나 전시 팸플릿에 쓰인 설명은 어렵고 지루하다. 도대체 그림은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 걸까?미술관에 가기 전, 당신이 알아야할 모든 것을 이 한 권에 담았다. 4가지 키워드로 단숨에 익히는 ‘초보자를 위한 미술감상법’. 따라서 책의 각 장은 시간의 흐름이나 주제에 따른 설명이 아닌, 미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떠올렸을 법한 흥미로운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상주의 그림의 선은 왜 흐릿할까?’ ‘코가 두 개 달린 초상화를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은?’ ‘추상화 속 움직이는 도형들은 대체 무슨 뜻일까?’ ‘왜 어떤 그림은 비싸고 어떤 그림은 싼 걸까?’ ‘누드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몸매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동안 내심 궁금했지만 아무도 속 시원히 대답해주지 않았던 호기심 넘치는 질문들을 전문가의 명쾌한 해설과 함께 유쾌한 토크쇼 형식으로 하나씩 풀어본다.두 명의 전문가와 함께 하는 유쾌하고 즐거운 그림 수다인기리에 방영된 독일의 교육방송이 책으로 다시 태어났다이 책은 독일의 인기 방송 프로그램을 편집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깊이 있고 다양한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깐깐한 두 명의 미술 전문가가 뭉쳤다. 고전미술을 담당한 라이문트 뷘셰는 독일 국립 고대미술관의 학예실장이며, 현대미술 담당 볼프강 플라츠는 활발하게 활동 중인 행위예술가다. 미술에 관심은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몰랐던 왕초보 학생을 대상으로, 두 명의 전문가는 총 4가지 키워드를 통해 스스로 미술작품을 볼 수 있는 감상법을 차근차근 가르쳐준다. 생생한 도판을 곁들인 두 전문가의 재미있는 설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보면 어느새 “어라 미술감상, 어렵지 않은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당신과 기꺼이 미술관까지 동행할 유쾌하고 든든한 친구 같은 책이다.“우리는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들도 자신 있게 미술관을 찾을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어떤 예술작품이든 감상자의 시선 없이는 죽은 물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들어가며> 중에서역사 · 작품 · 예술가 · 감상자이 4가지만 알면 이제 당신도 자신 있는 미술 애호가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작품’ ‘예술가’ ‘감상자’. 기존의 미술서가 미술사를 중심으로 여러 예술가와 작품들의 이야기를 곁들여 설명해왔다면, 이 책은 하나의 미술작품을 둘러싼 각각의 요소들을 독립시켜 우리가 미술을 접할 때 반드시 필요한 4가지 시선을 보여준다.제1장 역사 : 단 14점의 작품으로 미술사 1만8000년의 역사를 읽다라스코 동굴벽화에서 앤디 워홀의 토마토 깡통까지 길고 긴 미술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작품 14점만 뽑았다. 이 14점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미술이라는 커다란 숲의 줄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또한 각각의 미술사조가 다음 시대의 양식으로 변화할 때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쟁점들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엮어 독자들이 미술사 양식의 변화 모습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고작 물감 하나가 어떻게 미술사의 혁명을 만들었느냐고? (…) 튜브 덕분에 화가들은 이제 물감을 챙겨 어디든지 떠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야외에서의 그림 작업이 훨씬 쉬워졌다. 훗날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물감 튜브가 없었더라면 인상주의도 없었노라!’고 말했다.” - 49쪽 <인상주의: 그림 속 윤곽선은 왜 갑자기 흐릿해졌을까> 중에서제2장 작품 : 단 5개의 화풍으로 세상의 거의 모든 미술작품을 구분하다초상화 · 정물화 · 풍경화 · 장르화 · 역사화. 이 5가지 종류로 세상의 거의 모든 미술작품을 분류할 수 있다. 게다가 다소 평범해 보이는 그림에도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는데, 이를테면 정물화는 사실 암호를 찾는 그림이다. 예술가는 정물화를 그리며 그림 속에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숨겨놓곤 했다. 예를 들어 바이에른이 그린 정물화의 주인공은 중앙의 커다란 가재가 아니라 구석에 얌전히 놓인 시계이다. 한편 장르화는 멋지게 들리는 이름과는 달리 당시 사람들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그린 그림을 뜻한다. 여기에는 주로 벼룩을 잡는 소년이나 할 일 없이 가게에 앉아있는 우울한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졌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은 대부분 우울함을 담고 있다. (…) 그의 1925년 작품 <철로변의 집>은 어찌나 오싹한지, 공포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이 그림에서 영화 <싸이코>의 배경이 되는 여관에 대한 영감을 얻어갔다고 할 정도다.” - 92쪽 <장르화: 일상의 염탐꾼이 된 예술가> 중에서제3장 : 예술가의 머릿속은 우리와 어떻게 다를까?시대에 따라 예술가의 사회적 위치는 다채롭게 변화해왔다. 중세에 한낱 기술자로 취급받았던 화가들은 르네상스에 이르러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발돋움했는데, 이 시기의 화가 뒤러는 거만하게도 그림 속 자신을 예수님처럼 표현하기까지 했다. 한편 예술가의 유별난 성격이 작품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거친 성격의 사고뭉치 화가 카라바조는 언제나 살인과 폭력사건에 휘말리기 일쑤였고, 작품 속에도 창녀라든가 단정하지 못한 장면들을 과감하게 그려 넣어 당시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또한 달리의 괴상한 성격과 폴록의 우울증은 이전에는 없었던 독특한 양식의 그림을 탄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위대한 화가 루벤스는 사업가로서의 수완 역시 뛰어나 훗날의 앤디 워홀처럼 자신만의 공장에서 그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가 하면, 작품을 동판화로 만들어 인쇄해 유럽 전역에 퍼뜨림으로써 스스로 유명세를 만들기도 했다. “작업장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자. 스승이 먼저 밑그림을 종이에 그려낸다. 그러면 제자들이 그 그림을 커다란 캔버스로 다시 옮겨 그린다. 다음은 각 세부를 담당하는 화가들의 차례다. 루벤스는 한 종류의 그림만을 그리는 화가들을 따로 고용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동물만, 한 사람은 꽃만, 한 사람은 사람의 몸만 그리는 식이다.” - 137쪽 <루벤스는 어떻게 40년 동안 3000점을 그렸을까?> 중에서제4장 감상자 :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이 장에서는 미술작품을 관찰하는 다양한 안경을 활용하여,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림 속 이야기들을 한 꺼풀 벗겨 보여준다. 알고 보니 ‘모나 리자’는 고지혈증 환자였고,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어느 풍경화는 훗날 전쟁으로 폭격을 맞은 도시를 재건할 때 유용하게 쓰였다. 심지어 화가들의 의도인지 실수인지 모를 실수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티슈바인은 괴테의 초상화를 작업하면서 왼쪽 다리만 두 개 그려 넣었다. 책의 마지막에는 가볼만한 국내외 미술관을 소개하고 있어 지금까지 배운 미술감상법을 활용해볼 수 있도록 했다. “다음 환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 리자>다. 일단 눈에 띄는 점은 오른손에 불룩 튀어나온 부분인데, 혈액 내 지방이 많아 콜레스테롤이 축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녀의 안구는 노란빛이 도는데, 이는 전형적인 고지혈증 증상이다. 고지혈증을 치료하지 않으면 환자는 보통 50세 이전에 사망하게 된다.” -172쪽 <환자를 진찰하는 안경> 중에서고전적인 명작에서 현대미술의 최전선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서양미술의 핫이슈를 한 번에 읽는다 기존의 미술서가 잘 알려진 명화에 관한 지식을 주로 다뤄왔다면 이 책에서는 더 나아가 최근의 미술계 소식과 연구 성과까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2011년 12월에는 카타르 왕가가 사들인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미술품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는데, 이러한 국내외 미술계 소식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미술시장의 특성 및 미술품의 가격형성 과정, 그리고 현대예술가의 작업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알기 쉽게 정리했다. 또한 앵그르·베르메르 같은 고전 거장들이 창작 과정에서 카메라 오브스쿠라를 활용했다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이론과, 벨기에의 의사 데크베커르가 연구한 그림 속에 숨겨진 의학 자료도 소개하고 있다. 

  • 남자, 그림이 되다
    남자, 그림이 되다
    그 남자, ‘그림 되네’ - 중세의 날품팔이 일꾼에서 파스타를 요리하는 현대의 초식남까지
    저자
    가브리엘레 툴러
    역자
    박광자
    정가 17,000원
    판매가 16,150원 (5% 할인, 적립금 850p)

    그 남자, ‘그림 되네’ - 중세의 날품팔이 일꾼에서 파스타를 요리하는 현대의 초식남까지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요구된다. 강하지만 적당한 순간에는 부드러워야 하고, 카리스마가 있지만 헌신적이어야 하며, 부지런하고 야심만만하며, 건강하고 매력적이며, 우아하고 스포티하며, 유혹적이며 음탕해야 한다. 남자에 대한 얘기들은 한마디로 온통 모순적이다. 그러니 그림 속 남자들의 모습이 그토록 다양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그림 속 여자들과 달리, 그림 속 남자들은 종종 추하거나 볼품없다. 서양미술사에서 여자들이 대체로 아름다운 용모에 초점을 두고 가상의 여신이나 악녀 캐릭터에 끼워 맞춰진 데 비해, 남자들은 좀더 현실에 밀착된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남자들의 다채로운 이모저모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천편일률적인 그림 속의 미녀들이 오히려 빛을 잃는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소년, 사랑스러운 연인, 다정한 남편과 아버지, 한껏 멋을 낸 신사, 자신의 일에 몰두한 노동자… 어느 시대에나 남자들은 이런 요구들 속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갔고, 화가들은 그들에게서 다양한 빛깔의 남성상을 포착해왔다.남자, 그림 앞에서 길을 잃다? - 남자, 그림 속에서 나를 찾다그림 속 남자를 얘기해보자고 하면, 대상화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남자들은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림이란 건 무엇보다 아름다운 여성, 그것도 누드가 제일 중요한 주제잖아? 남자랑 그림을 어떻게 엮지? 꽃미남들 누드나 보여주면서 여자들이 눈요기하는 책 아닐까?’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그림 속 남자들의 겉모습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진부한 수식어를 늘어놓는 것도 아니다. 저자의 발랄한 필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청년 뒤러가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히피들에 뒤섞여 함께 술잔을 기울이게 하고, 19세기 독일의 소시민적 남성상을 담아낸 발트뮐러의 자화상을 “사윗감으로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 없는… 장모님의 귀염둥이”로 묘사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누드화는 “제3의 남성상”, 남자다운 신체 특징을 고루 갖추었음에도 섬세하고 유혹적이며 부드러운 양성적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였던 루시안 프로이트에게는 뚱뚱하고 살이 늘어진 친구의 알몸이 영감을 주었다. 누드에서 사람들은 보통 아름다움을 좇지만 프로이트는 “그로테스크하고 추한,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살덩어리의 미학을 추구했던 것이다. 조반니 볼디니가 그린 19세기 최고의 멋쟁이 몽테스키외 백작은 21세기의 웬만한 멋쟁이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 법하다. 패션잡지에서 빠져나온 듯한 그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데엔 “매주 셔츠 약 20벌, 손수건 24개, 여름 바지 9~10벌, 스카프 30개, 조끼와 스타킹 한 다스 이상”이 필요했다. 첨단 유행을 만들어냈고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즐긴 그는 메트로섹슈얼 독신남의 선구자라 하겠다. 이처럼 미술이라는 거울에 비친 남자들은 여심을 흔들 뿐만 아니라 남성이 자신의 잠재된 면, 새로우면서도 낯설지 않은 모습을 재발견하게 한다.연인과 가족의 프리즘을 통해 드러나는, 남자의 일곱 빛깔 아름다움혼자 있는 남자도 아름답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있는 남자는 더욱 ‘그림 좋게’ 마련이다. 프란스 할스의 신혼부부는 4백 년 전의 그림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한 생동감을 지녔다. 친근감 느껴지는 평범한 얼굴들, 신랑의 흡족스러운 표정과 신부의 수줍은 듯 애교 띤 미소는 의상만 제외하면 현대의 결혼사진과 다를 바가 없다. 19세기의 러시아 화가 마콥스키가 그린 노부부도 눈길을 끈다. 햇살 가득한 마당에서 남편은 과일 껍질을 까고 아내는 잼을 만든다. 소박하지만 행복한 이들의 모습은, 20세기에 드웨인 핸슨이 묘사한 중산층 부부의 공허하고 적막한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핸슨 특유의 극사실주의로 이 황량함은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묵묵히 서로의 곁을 지키는 이 부부는 적어도 18세기 윌리엄 호가스가 묘사한 ‘막장드라마’ 속 귀족 부부보다는 낫다고 하겠다. 양가의 돈과 지위를 교환하는 식으로 이루어진 정략결혼은 정작 당사자들의 냉담함 속에 불륜과 파국으로 이어진다. 여성 화가들이 묘사한 연인과 남편의 모습 또한 흥미롭다. 타마라 드 렘피카가 그린 아담과 이브, 그리고 이별하는 커플은 대담하고 파격적인 화법과 금속성 색조에도 불구하고 쓸쓸한 애조를 띠고 있다. 한편 메리 커샛은 오빠와 조카를 그리면서 두 남자의 몸이 한덩어리를 이룬 듯 표현해 서로 꼭 닮은 이 부자의 유대감을 드러냈다.<진주 귀고리 소녀>나 <우유 따르는 여인> 등 베르메르가 그린 여성들은 항상 주목받아왔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남성들이라고 단지 여성들 곁에서 보조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여성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남성들의 은근한 시선, 모호한 표정에 숨은 욕망 혹은 경멸을 저자는 꼼꼼히 읽는다. “남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는 여자를 쳐다만 보고 있는데 그 시선이 별로 곱지가 않다… 무엇보다 혼란한 것은 남자의 이상한 표정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무관심하고 깔보는 듯하며 멸시와 역겨움, 일종의 적대감까지 드러낸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유혹의 기술을 잘 파악한 사람 같다. 점잖아 뵈는 그의 태도는 허식일 뿐이다…”고되게 그러나 힘차게, 일하는 이 남자들을 보라여인숙을 전전하고 돈이 떨어지면 그림으로 대신 지불하며 살아가다 서른두 살에 페스트로 세상을 뜬 아드리안 브라우버르의 삶은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림 속의 떠돌이 치료사는 실제 그의 직업이기도 했다. 아돌프 멘첼의 철공소 그림은 노동자들의 일상을 보이는 대로 충실히 묘사함으로써 놀라운 산업적 발전, 한편으로 노동자의 소외라는 근대사회의 양면성을 담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카유보트의 마룻바닥 연마공, 에거-린츠의 척박한 산악지대 농부, 그리고 오토 그리벨의 노동자 인터내셔널 연대 또한 일하는 남자들의 고난과 의지를 강렬하게 보여준다.“생산 방식이 ‘발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가난은 대도시에 추악함의 파도를 불러들였다… 질병이 생명을 갉아먹고 역겨운 냄새가 골목에 넘쳤으며 길에는 쓰레기, 유리조각, 썩은 야채와 과일, 죽은 생선과 뼈가 널렸다. 공장 굴뚝은 하늘을 꺼멓게 만들고 시꺼먼 강은 도시로 흘러넘쳤으며 가죽 공장을 비롯한 여러 공장들의 폐수가 도시를 시퍼렇게 물들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노동자들이 마치 잿더미 속에서 일어나는 불사조처럼 자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그들은 착취당하고 고통당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웅이 되어, 자랑스럽게 시선을 똑바로 하고 이쪽을 바라본다. 스트라이크가 그림의 모티브가 되었고, 이제 노동자들을 그리는 그림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경우 몸은 덜 힘들지 모르나 역시 그들대로의 고충에 시달린다. 이 남자들의 분신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중산모에 양복, 현대 서구 사무직원의 유니폼 차림인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무수히 복제되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다. 획일화되고 익명적인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출퇴근길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쏟아져나오는 직장인들과 다르지 않다.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아침저녁마다 거리를 채웠다가 빗방울처럼 각자 외로이 흩어져 사무실 파티션 안으로, 혹은 자신의 방 안으로 파고들 그 남자들.남성 영웅과 지도자의 연약한 속살을 드러내다이처럼 남자의 내면을 파고드는 저자의 시각은 역사상의 영웅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야생트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 초상화는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지만, 당시 왕은 이미 63세로 통풍에 시달려 모델로 서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실제보다 훨씬 젊고 강하게 그려진 초상을 보고 왕은 기뻐하며, 원래 손자에게 보내기로 했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에 걸어두었다.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모습은 다비드의 그림으로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간 며칠 후 노새를 타고 호위를 받으면서 뒤따라갔다고 한다. 게다가 이 그림의 모델을 서지도 않았는데, 초상화란 실제 얼굴과 비슷한 것이 문제가 아니며 “단지 자신이 천재임을 알아보도록” 그려지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세기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지상에서 신의 최고 대변자… 남성적인 우월함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300년 후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초상화를 토대로 50점이나 되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 권위를 완전히 해체해버린다. “남성적으로 보이려면 남성성이라는 가면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 베이컨의 작업에서는 남성성이 너무 과장되어 과도한 상태, ‘발작성 가면’ 상태까지 갔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남성 육체의 그림은 남성성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 그리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기호와 지표를 남성적인 것으로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긴장되고 힘 빠지는 일인지를 보여준다. 베이컨의 작품 속 남성의 육체가 꾸준히 분열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남성성이라는 카테고리에 대한 고정관념,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변의 담론에 대한 저항이다.”남자, 당신은 아름답다미켈란젤로의 <다비드>로 시작된 이 책은 피에르와 질의 <나르시스>로 끝난다. 둘 다 잘생긴 얼굴에 늘씬한 몸매의 청년들을 묘사한 작품들이다. 이 두 작품에는 따로 설명이 붙어 있지 않지만 딱히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저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남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달라진 점이라면, 르네상스 시대와 달리 현대에는 그림 속 남자들도 여자들만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균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미술에서 여성의 초상화가 차지하던 우위는 매혹적인 남성들의 이미지에 도전받게 되었다. 서양미술사의 갈피마다 빛을 발하는 남자들을 경쾌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짚어주는 이 책은, 남녀 모두에게 신선한 체험이 될 것이다.

  • 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Art Guide 11)
    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Art Guide 11)
    그림 속에 숨겨진 사랑과 욕망의 상징과 코드를 해석하다
    저자
    스테파노 추피
    역자
    김희정
    정가 19,600원
    판매가 18,620원 (5% 할인, 적립금 980p)

    사랑하고, 욕망하고, 그리워하고, 소유하고자 한다순수한 낭만과 육체적인 욕망이 공존하는 사랑의 양면성기원전 23000년에 만들어진 밀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현대 팝아트 거장의 작품까지, 사랑은 몇 천 년을 흘러온 미술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며 다루어졌다. 지금도 전 세계의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에는 다양한 사랑의 풍경이 담긴 수많은 그림이 걸려 있다. 이 중에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남녀의 가슴 떨리고 순수한 사랑도 있고, 도발적인 욕정과 소유욕으로 얼룩진 치정의 장면도 있다. 사랑을 다룬 미술 작품들은 지구상에 모래알만큼이나 많지만 그 중에서도 미술사의 중심을 이뤄왔던 것은 신화나 문학에 등장하는, 한없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표현한 작품들뿐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이면에는 순수하고 낭만적인 장면뿐 아니라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을 다룬 작품 역시 존재했다. 이러한 그림들은 때때로 고상한 관람자들을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지만, 사실 육체적 욕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랑의 본질이다. 이렇게 인간의 성적 본능을 표현한 그림에 대한 오랜 터부에 대해 19세기의 화가 마네는 대표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누드화를 혹평했던 보수적인 평론가들이 아카데미 화가들의 에로티시즘에는 호의를 보인다며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우리가 그 동안 몰랐던, 그림 속에 숨겨진 사랑과 욕망의 상징과 코드를 해석하다.다양한 상징과 코드의 비밀을 알고 보면 그림 감상은 더 즐겁다. 독자들은 저자가 풀어놓는 흥미진진한 해설을 통해 명화 속 장면에 더욱 깊이 다가간다. 서양미술의 거장들은 작품 안에 자신만의 상징과 코드를 감추어두길 좋아했는데, 사랑은 서양미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였던 만큼 작품 속에 숨겨진 사랑의 기호들 역시 매우 다채롭게 나타난다. 결혼 전, 약혼녀에게 보낸 자화상 속에서 뒤러는 손에 에린지움 꽃을 들고 있다. 이 꽃은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자의 정절을 상징하는 것으로, 장차 아내가 될 상대에 대한 화가의 순수한 마음이 드러난다. 전형적인 부부 초상화에 종종 등장하는 복슬강아지는 서로에 대한 충성의 상징이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에서는 엄숙한 결혼 맹세를 하는 부부의 발밑에 복슬강아지가 천진하게 놀고 있다. 부유한 귀족인 할렛 부부를 그린 토마스 게인즈버러의 부부 초상화 <아침 산책>에도 역시 흰 털의 포메라니안 한 마리가 등장한다. 이러한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세부 표현의 맥락에서도 빈틈없이 구성된 다. 화가들은 관람자의 감각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소재들과 장치들을 활용했다. 예를 들어 모피는 그 에로틱한 분위기 때문에 주로 젊은 여인의 나체와 함께 그려졌다. 루벤스는 작품 <모피를 두른 엘렌 푸르망>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어린 아내의 몸에 모피를 감쌌다. 엘렌은 화가보다 30살 이상 어렸는데, 젊고 관능적인 그녀는 노년의 루벤스에게 있어 영감의 원천이었다. 또한 앵그르의 유명한 작품 <오달리스크>에 등장하는 하렘의 미녀는 하늘하늘한 깃털부채를 들고 비스듬히 누운 채 관람자를 유혹하듯 바라본다. 바닥에 깔린 모피와 깃털부채는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의 촉감을 보다 효과적으로 강조하는 장치이다. 이렇게 때로는 여성의 육체를 보다 생생하게 그리기 위하여, 혹은 격렬한 사랑의 장면을 보다 에로틱하게 표현하기 위해 화가들은 다양한 상징들을 그림 속에 심어두었다. 로코코시대의 낭만적인 화가 프라고나르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었던 현장을 묘사하면서,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벌어지거나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침구를 화폭에 어지러이 배치하여 달아오른 욕망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감동, 역사에 남은 남녀들의 사연을 그림으로 읽다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한눈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파올로의 형수였다. 해서는 안될 사랑을 한 남녀는 서로에 대한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며 긴 시간을 견뎠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둘만이 남겨졌을 때 그들은 함께 중세 연애소설을 읽고 있었다. 아더왕의 아내 귀네비어가 그녀의 정부 란슬롯에게 비밀스런 키스를 하는 장면을 읽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에 빠진 이 둘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프란체스카의 남편은 아내와 동생 모두를 살해했다. 그들은 지옥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채 벌을 받으며 멈추지 않는 눈물의 이야기를 지옥의 방문자 단테에게 이야기했다고 《신곡》은 전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감동을 전하는 세기의 남녀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신화, 문학,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옛 연인들이 그들을 표현한 거장의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많은 명화들과 예술 작품들이 들려주는 남녀의 비밀스런 사랑 이야기는 독자를 바로 지금, 이 순간 생생한 열정의 현장으로 데려다 놓는다. 아름다운 도판을 통해 되살아나는 잊혀진 감정과 뜨거운 가슴을 기억해 보자. 따뜻한 사랑의 감성으로 돌아가는 일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자 예술이 이루고자 하는 1차 목표임을 책에 등장하는 많은 미술작품들이 강한 울림으로 전한다.

  • 죽음과 부활, 그림으로 읽기 (Art Guide 10)
    죽음과 부활, 그림으로 읽기 (Art Guide 10)
    그림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다 
    저자
    엔리코 데 파스칼레
    역자
    엄미정
    정가 19,600원
    판매가 18,620원 (5% 할인, 적립금 980p)

    그림과 함께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새롭고 흥미로운 지식 여행!‘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 경구불편한 진실, 죽음에 관한 모든 것자연과 우주의 무한한 힘에 압도당했던 옛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 혁명을 통해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우리들 역시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바로 인간은 자연에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나약한, 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점이다. 이 책은 인류가 그토록 극복하기를 원했지만,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엄연하고도 불편한 진실인 죽음이라는 주제를 서구의 시각문화를 통해 살펴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죽음의 원인에서부터 죽음의 도상과 상징, 그리고 묘지와 유골함 등 죽음에 관련된 모든 이미지를 종합하여 ‘죽음’의 면면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죽음의 이미지《죽음과 부활, 그림으로 읽기》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부터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까지 시대에 따라 다른 매체와 표현 방식으로 나타난 죽음의 이미지를 소개한다.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죽음의 이미지를 살피다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있음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 속에 늘 자리하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려했던 죽음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그런데 죽음에 대한 그림을 무작정 살펴본다고 해서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상징적인 기호를 통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 같은 기호 해석을 위한 도상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아르스 모리엔디(죽음의 기술)’, ‘에트 인 아르카디아 에고(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서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죽음의 승리’, ‘죽음의 춤’ 같은 죽음의 도상을 읽는 법을 하나 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줌으로써 그림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또한 고흐, 피카소, 고야 같은 거장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데미언 허스트, 브루스 나우먼 같은 재기 발랄한 현대 미술가들의 사진이나 설치미술을 함께 실어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보는 즐거움도 선사한다.죽음에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하다이 책은 죽음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부활도 함께 다루고 있다. 모든 생명체가 휴식에 들어가는 겨울이 지나면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봄이 오듯이 죽음은 이승의 삶을 끝내는 마침표이기도 하지만 부활의 상징이기도 하다. 죽음, 그리고 부활을 함께 바라보다 보면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 마네 같은 화가들이 예수의 수난과 처형, 그리고 그가 다시 부활하여 승천하는 과정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거장들의 화풍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 I, Tiziano (티치아노가 말하는 티치아노의 삶과 예술)
    I, Tiziano (티치아노가 말하는 티치아노의 삶과 예술)
    대담하고 찬란한 색채의 화가 티치아노의 삶과 이야기 
    저자
    노베르트 볼프
    역자
    강주헌
    정가 38,000원
    판매가 36,100원 (5% 할인, 적립금 1,900p)

    ‘대담하고 찬란한 색채의 화가’ 티치아노의 목소리를 듣는 특별한 감동을 선사합니다!화가가 남긴 말과 글을 통해 생애와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I, 시리즈. 2007년 《I, van Gogh》를 시작으로 2008년 《I, Goya》, 2009년 《I, Raffaello》로 이어지며 일 년에 한 번, 애장판 특별 한정본으로 출간되어 미술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2010년 I, 시리즈가 선택한 화가는 바로 ‘빛과 색의 마술사’ 티치아노다. 티치아노(1488(90)~1576)는 대가다운 그림뿐 아니라 매력적인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화파가 배출한 최고의 화가로 생전에 궁정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16세기에 시도된 회화의 거의 모든 장르, 즉 초상화와 종교화를 비롯해 알레고리, 고전시대의 신화와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에서 새로운 기준을 정립했다. 거칠지만 힘있는 붓터치, 동적인 구도와 독특하고 뛰어난 색채를 보여줌으로써 그는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바로크 회화로 나아간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I, Tiziano》는 250×330mm의 대형 판형으로 제작되어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 제단화 등 규모가 큰 작품의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도록 했으며, 티치아노만의 독특하고 화려한 색감을 살려 빛과 색을 통한 감동이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했다. 신비롭고 웅장한 르네상스 미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뜻깊은 선물이 될 것이다.나, 티치아노가 말하는 삶과 예술티치아노는 다른 사람의 작품이나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남긴 글이 적다. 그 때문에 지인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통해서나 그의 글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생전에 베네치아의 궁중 화가로 활동하면서 그 명성이 이탈리아 전역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여러 역사적 기록에서 티치아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평론가 바사리가 남긴 《미술가 열전》의 티치아노 편, 시인이자 극작가로 활동하며 티치아노와 친밀하게 지냈던 아레티노의 글을 통해 당시의 시대 상황뿐 아니라 티치아노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대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도 알 수 있다. 티치아노는 스스로 나이를 부풀렸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지만 90세 가까이 장수한 것으로 전해지며 그가 남긴 작품은 대략 400~600점으로 추정된다. 나체화나 기독교적 주제의 그림, 초상화 등 다양한 의뢰를 받아 연평균 80여 점 정도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 세계는 시대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5가지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베네치아 궁정 화가로 활동했던 1518년까지, 프라리 성당 제단화를 통해 화가로서의 명성이 이탈리아 전역에 알려지게 된 1519~1530년, 국내외 여러 궁전에서 의뢰를 받으며 초상화가로서 입지를 굳힌 1530년대, 신성 로마 제국의 가장 뛰어난 화가라는 평판을 얻으며 교황의 초상화를 제작하고, 인물의 자세와 위치를 통해 인물의 인격을 전달하는 새로운 초상화의 전형을 이룩한 1540년대, 바로크 양식의 선구로 평가받는 ‘후기양식’을 이룩한 1550년대 이후를 5기로 구분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재능 있는 화가들은 왕이나 교황에 버금가는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경우가 많았다. 동시대의 라파엘로는 천재적인 재능과 더불어 아름다운 외모와 깊은 신앙심 때문에 신성시되기도 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티치아노는 평생 동안 경제적인 안정을 추구했고 교황과 귀족들에게 적당히 자신을 낮추고 오랫동안 지배계급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그의 지적수준을 의심받았고 작품의 격이 낮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방식은 고상함과 재치, 뛰어난 사교술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편지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토론할 의지와 역량이 있었다. 또한 말기에 은둔 생활을 했다는 소문과 달리 사교적이었고 노년이 되어서도 큰 일거리를 맡으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그는 삶의 마지막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자유로운 붓질로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어두운 화면 처리와 불안정하면서 두꺼운 붓질의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그가 이룬 말년의 후기양식은 고전적 양식을 탈피해 바로크 양식을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 프랜시스 베이컨 (ART SPECIAL 11)
    프랜시스 베이컨 (ART SPECIAL 11)
    인간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저자
    안나 마리아 빌란트
    역자
    이수연
    정가 17,000원
    판매가 16,150원 (5% 할인, 적립금 850p)

    인간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감각의 이면을 드러낸 실험적인 예술정신 인간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자각 그리고 창조적 투쟁혼돈과 무질서 속에 담긴 그의 내면세계를 읽어 내다!스스로를 통제한 예술적 혼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진부한 존재를 장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도 좋을 것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의 삶은 불안하고 무절제했지만, 작품에 대해서만은 대단히 철저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빠르게 작업에 집중했다. 심지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은 마신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이른 아침이면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이러한 철저함과 끊임없는 노력은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되었고 사람들의 평으로 이어졌다. 물론 초창기에는 세간의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답고 온전해 보이지만 그 속에 감춰진 고독과 불안, 필연적인 고통을 머금은 인간의 내면을 그림으로 표출시킨 그의 예술 세계는 곧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1971년, 생전에 가장 크게 열린 회고전은 엄청난 관람객을 끌어들였고 그는 이어 프랑스 잡지 《예술경험》이 선정한 가장 중요한 생존 화가 10인의 명단 중 1위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의 완벽함과 철저함은 사후에 그의 집과 스튜디오에서 발견된 연구 자료에서도 드러난다. 수많은 화집과 논문, 개인적인 복제품들은 그가 생전에 거장들을 얼마나 철저히 분석하고 모방하며 재창조했는지를 말해준다.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디에고와 렘브란트, 고흐 등 그는 많은 이들의 작품을 연구해 자신의 예술과 연관시키고자 했다. 또한 그에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된 머이브리지의 연속 사진의 영향 역시 그의 연작에 잘 나타난다. 잠재적이고 다층적인 감정과 형이상학적인 구조 그리고 삶이라는 복합적인 본질에 관심을 두고 표현에 전념했던 베이컨 예술의 영향력은 대규모 회고전과 최고가 경매라는 기염을 토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비극적 존재인 인간에 관한 철학적 사유 주제의 독특한 변형과 왜곡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곤 했던 자신의 작품에 대해 베이컨은 “모든 형상이 함축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그릴 때는 당연히 그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들이 영향을 주는 방식도 묘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그는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다. 이성적이고 지루한 전달이 아닌 감각을 전달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추구한 신념이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야만성과 잔인성, 왜곡과 소외는 베이컨이 모델과 주제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해 느낀 민감한 지각을 말해준다. 베이컨이 주제의 특징을 독특하게 변형하고 왜곡한 것은 폭력을 휘두르거나 의식적으로 추하게 그리려고 한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 모델 본인의 인식과 상태를 포착하기 위한 시도였다. 삶과 죽음의 이중성, 곧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과 고유의 존재론적 위기에 직면한 불안 그리고 내면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인간이 고독하고 비극적인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그는 과감하게 배경을 축소하는 의식적인 전략을 사용한다. 그 속에서 강렬하게 드러나는 인물의 왜곡과 분열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적잖은 충격을 전해준다. 그러나 인간과 삶에 대한 그의 철학적 사유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시각을 확장시켜 준다.